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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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민주시민교육에 더이상 시기상조는 없다



이충일



“이 쇼의 주제는 현실이에요.”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2025)을 제작한 프로듀서 조 존슨(Jo Johnson)의 말이다. 「소년의 시간」은 롱테이크 촬영 기법을 통해 우리 시야에서 암전 상태에 있던 여성혐오가 얼마나 끔찍한 지경에 와 있는지를 핍진하게 보여준다. 세계적 반향을 일으키며 이 드라마를 본 이들이 패닉에 빠진 것은 그 그악한 현실이 우리 모두의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SNS를 타고 급속히 번지는 젠더혐오와 극우에 이끌리는 젊은 세대의 출현은 어느새 전세계가 당면한 현실이 아닌가. 일각에서는 청소년들의 SNS 사용을 막아야 한다는 극약처방까지 내놓고 있지만, 늘 그렇듯 문제의 본질은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교사의 지시를 가볍게 무시하고, 친구의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앞에서도 서슴없이 장난과 욕설을 내뱉는다. 괴롭힘과 혐오적 하위문화가 지배하는 학교에는 죽은 친구를 향한 애도의 감정 대신 조롱과 비난이 가득하다. 나에겐, 폭력적인 SNS 세계보다 희망이 사라진 학교가 한층 더 절망스럽게 다가왔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는 「소년의 시간」이 중학교 교육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되지도 않는 궁금증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까? 아니, 질문을 좀 구체적으로 바꾸는 편이 낫겠다. 과연 우리나라 교실에서 ‘남성주의’와 ‘반페미니즘’, ‘디지털 범죄’와 같은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가능할까? 일련의 상황을 추수해보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팬데믹으로 온라인 수업이 도입되었던 2020년 3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EBS 라이브 특강(31일) 오픈채팅방에는 익명을 빌미로 욕설과 음담패설이 도배되는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한데 지금은 “그때는 알아볼 수나 있었지”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폭력적 언어는 은밀한 형태로 교실의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다. 아이들 발표물에 극우 커뮤니티 상징이 숨겨져 있었다는 증언, 아이들이 내뱉은 말이 혐오성 발언인지도 몰랐다는 초중등 교사들의 토로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5년 전 우리 사회를 패닉에 빠트렸던 일명 ‘n번방 사건’과 2025년 최악의 ‘사법유린’ 사건으로 기록된 서부지법 폭동사태는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되고 있다. 계엄의 현장이 증명했듯 ‘성숙한 민주시민’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구간 반복처럼 재생되는 교육희망론은 그 횟수만큼이나 허망하다. 어느 때보다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문재인정부 역시 학교의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명하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적 가치들을 수행하기에 학교 시스템이 지나치게 낡고 낡았다는 것. 교단선진화 사업과 AI 교육 등을 내세워 21세기 학교의 외관은 빠르게 변신해왔지만, 정작 학교민주주의를 둘러싼 핵심의제는 수십년간 봉인된 상태다.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시기상조를 내세워 유예를 거듭해온 의제들. 단언컨대 이것이 극복되지 않는 한 우리의 민주시민교육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시급한 과제 세가지를 제시하자면 이렇다.


첫째, 민주시민교육을 실현하는 주체인 교사의 시민권부터 회복해야 한다. 한국은 OECD 38개국 중 교사에게 정치기본권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이다. 2024년 국제교육연맹(EI)은 ‘한국 교원의 시민·정치적 권리를 보장할 것’을 만장일치로 촉구하기도 했다. 교사에게 학교가 ‘직업인으로서의 직무상 의무’가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학교 밖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교사의 정치기본권이 실현되는 공간은 학교 밖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학교 밖’이라는 전제를 괄호 안에 가둔 채, 아이들에게 정치적 편향성을 주입할 수 있다고 선동하는 언론을 보면 이제는 안쓰러움마저 들 지경이다. 민주적 시민을 양성하는 기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교사가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모순을 넘어 명백한 차별이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정치적 중립 보장’은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권리이지, 시민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 민주시민교육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법적·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은 1948년 제정된 헌법(제31조 제5항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거니와 제6차 교육과정(1992)을 출발점으로 잡더라도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하지만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러할 뿐, 실체적 내용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 반영되지 않은 민주시민교육은 교사 개인의 열정에 기대거나 일회성 수업에 머무는 한계를 답습해왔다. 최근에는 인권·평화·젠더를 주제로 수업하는 것 자체가 극도로 꺼려지는 분위기이다. 민주시민교육 관련 법안은 1996년 15대 국회를 시작으로 2025년까지 총 십여차례나 입법 발의되었으나 늘 거기서 멈춰섰다. 지난 정부에서 ‘인성체육예술교육과’로 흡수시킨 ‘민주시민교육과’를 부활시키고, ‘학교 민주시민교육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교원단체와의 충분한 숙의를 통해 일상의 교실 안에서 민주시민교육이 안정적이고 깊이있게 실현될 수 있는 법안이 조속히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셋째, 단위 학교의 리더를 세우는 방식, 즉 교장인사제도를 혁신해야 한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이고, 직선제는 이를 실현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국민이나 구성원이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뽑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기관인 학교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의 교장승진제도는 1964년에 제정된 ‘교육공무원임용령’을 모태로 60년 넘게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다. 2002년 노무현 정부의 대선공약으로 ‘학교장 임용제도 다양화’가 추진된 이래 2011년 교장공모제가 법제화되었지만, 여전히 승진형이 약 97.5%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김성천 「60년째 그대로… ‘교장’뽑는 방식이 잘못됐다」 , 오마이뉴스 2024.6.13 참고). 지난 윤석열정부 들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당장 현실적인 대안은 교장승진제의 폐지가 아니라 교장 임용의 ‘다양화’이다. 부수적인 조건 없이 어느 학교든 구성원이 원한다면 내부형 공모나 교장보직선출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단 한번도 다양성이 존재한 적 없던 교장인사제도 역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절실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 교실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한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평화·인권·젠더·헌법·기후와 같은 시급한 정치의제를 상호 존중의 언어로 토론하는 교실이 많아질 때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 앞에 언급한 세가지 과제를 단지 교사들의 권익으로 호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 민주주의라는 형식 없이 민주시민교육이라는 내용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K민주주의가 보여준 광장의 민주주의가 이제는 교문 안에서 일상의 민주주의로 실현되어야 할 때다. 낡은 틀을 벗어낸다면 충분히 희망은 있다.



이충일 /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화성 마산초 교장

2025.8.5.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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