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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야 할 세계



황정아



새 정부가 들어선 이래 지난 몇달간 빠른 속도로 나라꼴이 다시 정돈되는 느낌이다. 무능하고 사악한 권력자들의 못 볼 꼴만 줄곧 지켜봐야 했던 때를 이따금 떠올리며 그 시절이 지나갔다는 데 새삼 안도하게도 된다. 누구나 말하는 ‘민생’이 과연 무엇인지는 정의하기 나름이겠으나 어떻든 그것이 좀더 나아지리라 기대하는 분위기이고 적어도 사람 목숨을 함부로 해온 관행들이 시급히 해결할 의제로 부상하기는 했다. ‘영혼까지 갈아넣었다’는 대통령의 말처럼 최근 APEC정상회의와 미국과의 관세협상도 악조건에서 대체로 선방했다는 평가인데, 무엇보다 직접 일을 떠맡은 사람들이나 뒷받침하는 사람들 모두가 전력을 다했음이 전해진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지난 정부의 어이없는 행태로 입은 모욕과 수치, 그리고 나라가 수십년 전으로 되돌아가거나 심지어 곧 망할 것만 같던 불안을 떨쳐내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진전시킨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존감을 회복하는 중이다. 공개 국무회의나 지방 타운홀 미팅을 비롯해 이번 정부가 보여준 몇몇 장면들은 정치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정형화된 상을 바꾸고 정치에서 받으리라 예상치 못한 어떤 영감마저 주는 바가 있다.


야당과 사법부의 내란세력 비호를 포함하여 바닥이 드러난 엘리트 카르텔의 힘은 여전히 만만하지 않고 한층 흉포해지는 극우세력도 경계해야겠지만 어쨌든 결정적으로 퇴행할 위험을 막아냈다고 한다면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은 것일까? 그런데 오늘날 G2라는 미국과 중국이 무슨 ‘모델’일 리 없다는 건 너무 분명하고 언제부턴지 유럽은 제 앞가림만으로도 휘청대는 모습이다. 다른 지역이라고 뚜렷하게 치고 나오기는 역부족인 듯한 이 상황에서 도대체 어디가 ‘앞’인 것일까? 요컨대 ‘글로벌 스탠더드’의 지침에 순순히 따르고자 한들 현재의 ‘글로벌’에는 도무지 ‘스탠더드’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식민지적 근대 진입에 뒤이어 전쟁과 군사독재를 주르륵 겪은 우리는 늘 우리의 시간대를 세계의 시간과 견주어 판단하곤 했다. 역사를 선형적으로 파악하여 그 선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르는 일의 문제점은 잘 알려져 있으나, 순전한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세계의 실제 작동방식이기도 했기에 그것을 그저 잘못된 습관 같은 것으로 일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쩌기 힘든 그 틀을 직시함으로써만 벗어날 궁리가 절실해지고 그 절실함에서 때로 생각의 돌파구가 마련되기도 했다. 가령 시인 김수영에게 ‘세계’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기억해보자. ‘세계의 얼굴’ ‘세계적인 발언’ ‘세계문제’ 같은 숱한 표현이 보여주듯 ‘세계’는 그에게 하나의 기준점으로 첨예하게 의식되었다. “세계사의 전진과 보조를 같이”(「시작 노트 2」)하는 사유와 시를 향한 열망도 그가 자주 피력했던 것이다. 그에게 ‘세계’가 언제고 참조해야 할 대타자이기를 멈춘 시점이 4·19였다. 4·19의 뜻을 누구보다 철저히 새기는 과정에서 그는 “외국인들의 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읽어도 ‘뭐 그저 그렇군!’ 하는 정도다 (…) 좌우간 모든 것에 선망의 감이 없어”(「밀물」)졌다고 느꼈고, “시의 제재만 하더라도 세계적이거나 우주적인 것을 탐내지 않아도 될 듯하다. 우리나라의 국내적인 제 사건이 이미 충분히 세계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시작 노트 2」)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김수영이 날카로운 직관과 통찰로 일찌감치 감지한 바를 ‘빛의 혁명’으로 불리는 사건을 거치며 우리 대부분이 부쩍 체감하고 있다. ‘시의 제재만 하더라도’라는 김수영의 말을 받아 민주주의만 하더라도, 문학만 하더라도…… 같이 여러 단어로 교체해보아도 충분한 ‘세계성’을 자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말과 기분을 곱씹어보면 그때와 지금의 차이에도 주목하게 된다. 그에게 ‘세계성’이 더는 후진적이라 개탄하지 않고 이곳의 현실에 집중하게 해주는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세계성’은 이곳의 현실을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야 할 어떤 것이다. 세계가 우리의 위치를 가늠하고 나아갈 거리를 재어보는 기준점으로 작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서서 돌봐야 할 망가져가는 무엇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차기의 강력한 헤게모니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를 해결할 전망과 역량이다. 그렇기에 이른바 ‘K’라는 상징에는 이즈음 높아지는 자부심만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이 실려야 마땅하다.


티핑포인트를 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기후위기에서 SF적 미래의 도래 같은 AI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는 ‘초객체’(hyperobject)로 부를 만큼 인간의 인식과 정신의 통상적 틀을 벗어나는 스케일의 문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체로 합의했다고 믿었던 규약마저 쉽게 버려지고 이제 정착했다고 생각한 평화도 느닷없이 깨어지는 세계이기도 하다. ‘스탠더드’ 없는 세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는 일에도 ‘영혼을 갈아넣어야’ 한다면, 민주주의의 문법을 갱신하고 자본주의적 원리를 넘어설 다른 기준을 세우는 데는 얼마나 많은 영혼의 전념과 단련이 필요할까? 하지만 돌아보면 남들의 눈에 속국으로 보일 때나 본격적으로 식민지가 되었을 때나 한결같이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 심화된 보편적 비전을 더 강렬하게 지향해왔던 것이 K사유의 한 특징이었다. 많은 조건이 비할 바 없이 나아진 오늘,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낼 의지와 실천을 한층 가다듬을 때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5년 겨울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2025.11.25.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