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싸우지 않아서 생겨나는 것
캐나다 작가 나오미 클라인은 『노 로고』 『쇼크 독트린』 등의 저서를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착취 전략을 파헤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진보적 행동가다. 이런 소개에 말을 보태면 보통 다음과 같은 단어가 더 따라붙는다. 도발적인, 단호한, 예리한, 논증적인, 실천적인 등등. 이 단어들을 목걸이로 꿸 수 있는 실은 ‘확신’일 것이다. 확신은 분명한 구분을 전제한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 동지와 적……. 그 경계를 가르는 선이 늘 또렷하지는 않더라도 확신의 눈은 이쪽이 아닌 저쪽에 있는 얼굴을 알아본다. 클라인의 최근작 『도플갱어』는 그 저쪽 얼굴이 자기 얼굴과 아주 흡사하다는 걸 발견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확신을 탐구한 기록이다.
시작은 두 명의 나오미다. 클라인은 지난 10여 년 동안 자신이 또 다른 ‘나오미’와 종종 혼동 당하는 바람에 난처했다는 사실부터 털어놓는다. 그 나오미는 바로 진보적 페미니스트에서 코로나 백신 음모론 선동가가 된 작가 나오미 울프다(이 변모에 대해 클라인이 세운 공식은 다음과 같다. “나르시시즘(과장성)+소셜미디어 중독+중년의 위기÷대중적 망신=우파 멘붕”(174면). 소설가 필립 로스가 『샤일록 작전』(비채 2025)에 쓴 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소롭고, 가소롭다기엔 너무 심각한’ 이 황당한 상황을 파고들면서 클라인은 정치와 문화 전반에 만연한 도플갱어, 혹은 거울 세계를 발견한다. 그 거울에 비쳐 보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악의적 쌍둥이”(222면)다.
클라인은 하나씩 짚어나간다. 우선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하는 또 다른 나, 브랜드로서의 ‘나’에 대한 열망이 있다. 분할, 수행, 투영을 거쳐 디지털 세계에서 탄생한 도플갱어의 뒤에는 ‘셀프 브랜딩’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이 있다. 개인 브랜드로서 관심을 끌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 주목경제체제 속에서 영향력을 갈구하는 욕망은 코로나 시기에 횡행했던 극우 음모론과 접속하면서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코로나 시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2장에서 클라인이 강조하는 바는 극우 음모론자들의 주장에 어떤 의미로건 일말의 ‘진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백신 음모론은 근거가 없을지 몰라도 전염병을 기화로 국민의 사생활을 통제하려 드는 정부 정책에 빅테크 기업이 가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수집되는 개인정보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는 우려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있다. 백신의 안전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불안한 사람도,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 방역 정책 때문에 생계가 위태로워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위기는 코로나 극복이라는 대의 앞에서 어리석은 불평이나 불가피한 희생으로 치부된다. 그때 거울 세계의 도플갱어, 우리 자신의 악의적 쌍둥이는 “우리가 방치한 주제들, 우리가 열지 않은 토론들, 우리가 모욕하고 내친 사람들”(202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손을 뻗고 등을 두드리며 응어리를 풀어준다.
클라인에 따르면 이러한 음모론이 궁극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은 ‘정의라는 판타지’(385면)다. 오늘날의 세상이 부당하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이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아서 서운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국회의사당 지하에 땅굴 기지 따위는 없지만 지하철역에서 골판지를 깔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은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퍼뜨리는 비밀 조직 같은 건 없지만 변해버린 세상에서 자신의 ‘상식’이 조롱을 당할까 봐, 아니면 충분히 편들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워 침묵하는 사람들은 있다. 왜곡되고 흐릿할망정, 극우와 음모론을 통해 귀환하는 것은 진보가 외면했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진실의 흔적이다. 또는 디지털 세상에서 ‘캔슬(cancel)’시키고 몰아낸 다음 아예 소멸한 듯 취급했던 것들이다. 클라인의 도플갱어는 흔히 말하는 ‘싸우다가 닮아가’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아서’ 생겨난 것에 더 가깝다.
이 ‘진실’을 발설하는 극우와 음모론의 언어가 진보의 언어를 전유하고 있다는 클라인의 지적은 흘려 넘기기 어렵다. 저자의 친구가 투덜거리듯 “이젠 파시스트들이 우리 언어를 아예 베껴”(249면)간 것이다. 클라인은 다시 로스를 인용하면서 이를 ‘피피키즘’(pipikism, 240면)이라 일컫는다. 피피키즘은 단순한 미러링 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피피키즘은 언어의 가치를 퇴행시킨다. 극우 정치가가 자신이 타자이며 역차별을 당한다고 주장할 때 조롱당하는 것은 차별당하는 타자다. 법치를 우습게 보고 파괴하려 했던 자가 법대로 하자고 나올 때 우스워지는 것은 법이다. 말의 가치가 손상되면 토론은 사라지고 각자의 기분으로 판단하는 ‘헛소리’와 그 헛소리에 ‘긁혔는지 안 긁혔는지’를 따지는 공방만 남는다. 탈진실은 이런 토양에서 번성한다.
『도플갱어』는 저자의 개인사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가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책이다. 그러다 보니 다소 산만하게 흘러가는 인상을 주지만, 대신 곳곳에서 예리한(보시라, 결국 이 단어를 쓰고 말았다) 통찰이 번득인다. ‘과격한’ 어휘를 과감히 동원하는 생기 있는 번역 덕택에 읽는 재미도 크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자칭 중도 보수’쯤에 위치시킬 수 있을 ‘대각선주의’(169면)나 클라인이 ‘우리 세계의 기저’(380면)로 정의한 ‘음영 지대’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건 아쉽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인은 정체성에 대한 집착을 재고할 것과 연대의 복원을 도플갱어 문제의 대응책으로 시사한다. 클라인에 따르면 연대는 어찌 보면 “행동이 말보다 쉬운”(529면) 경우다. 그 주장을 우리가 ‘나’로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로서 사는 것 또한 시급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우리는 때로 너무 충만히 나로 살아간다. 충만한 나로 살아가는 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뒤집어 보면 나머지 세상을 배경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배경의 응달에는 당신을 닮은 존재가 당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 존재는 당신과 달리 시선을 돌릴 의향이 없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최민우 / 소설가
2025.12.2.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