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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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정병호 1주기, 타자와 관계맺는 실천인류학



늘 “괜찮아, 일없어” 하고 웃으며 누구보다 바삐 사람들을 이어왔던 실천인류학자 정병호가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그의 부재를 실감하는 지금, 한국사회는 여전히 깊은 불화와 불안 속에 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지닌 이들 사이의 혐오가 일상이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한반도 역시 냉전 이후 가장 경직된 정세 속에 놓여 있다. 북한은 헌법을 개정해 남한을 ‘적’으로 규정하며 ‘두 개의 국가’를 선언했고, 남한에서도 북한을 위험·후진·비정상으로 고정하는 언어가 더욱 공고해졌다.


분리와 배제, 혐오와 적대의 언어가 증폭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고난과 웃음의 나라』를 다시 펼친다.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했던 타자와의 만남, 그들과 함께 시간을 견디며 관계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분석과 공감의 균형을 가다듬는 일. 정병호의 글은 이러한 ‘만남의 윤리’를 새삼 일깨운다. 이는 오늘 우리가 평화를 다시 사유하기 위해 반드시 되짚어야 할 출발점이기도 하다.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전형적인 인류학 현장에서 탄생한 책이 아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걸어온 저자의 긴 여정에서, 우연히 스친 순간에서부터 깊은 머묾 속에 다져진 관계까지 차곡차곡 쌓여 완성된 기록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무엇보다 세상의 아픔을 먼저 감지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어 작은 변화를 일구어내는 실천가였다.


대학생 시절 신림동 난곡의 저소득층 밀집지역에 ‘해송아기둥지’를 설립하여 돌봄을 실천했던 일, 일본 보육현장을 탐구한 학위 연구, 귀국 후 공동육아 모델을 개발하고 첫 어린이집 원장을 맡았던 시간들은 모두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한 꾸준한 모색이었다. 그러던 중 1996년, 기근으로 고통 받는 북한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시작한 구호활동이 그의 북한연구의 첫 장을 열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저자는 남한의 ‘퍼주기’ 비난과 북한의 자존심 정치 사이를 관계 맺는 사람으로 꾸준히 건너다녔다. 방북이 어려울 때는 두만강 조중 접경에서 혹은 남한으로 온 북한이주민의 삶 속에서 또 다른 북한을 만났다. 짧지만 반복적인 만남, 서로 다른 장소와 삶을 잇는 지점들의 축적을 통해 구성된 그의 연구는 책상 앞에서의 사유를 넘어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길어 올린 실천적 지식이었다.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북한사회와 사람을 이해하려는 작업이자 북한을 둘러싼 오랜‘타자화’의 관습과 맞선 기록이기도 하다. 분단체제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북한은 흔히 ‘두렵고도 후진적인 존재’,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재현되어 왔다. 저자는 이를 정면으로 흔들어 북한을 이해와 소통의 지평에 놓고자 했다.


그는 먼저 북한의 문화적 논리를 역사와 관계의 두터운 층위에 놓아 다시 읽어낸다. 북한의 정치문화와 일상의 몸짓을 탈식민의 역사, 국제정치경제 구조, 사회주의 경제 네트워크의 해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위치시키며, “북한이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왔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내면화했는지”(13면) 묻는다. 이는 곧 타자와 관계 맺기를 위한 윤리적 실천, 즉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29면)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맥락화는 자연스레 비교의 시선으로 확장된다. 그는 북한을 남한 및 다른 사회들과 교차해서 읽는다. 차이를 부각하기보다 차이 아래 흐르는 공통성을 포착함으로써 북한을 ‘예외’로 고립시키지 않고 보편성과 특수성의 교차점에 다시 놓는다. 독자는 그 경계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문법을 성찰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 책 곳곳에는 호기심, 슬픔, 분노, 난감함, 울컥함, 부끄러움, 죄책감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믿음이 겹겹이 배어있다. 이는 독자를 저자의 자리로 초대하는 장치이며 분단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북한의 몸짓과 말을 부드럽고 입체적인 감정의 결로 풀어내는 통로가 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웃음’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웃음은 기쁨의 표정이자 고단함과 긴장을 버티기 위한 완충장치이고, 때로는 체제가 요구하는 의례적 표정이기도 하다. 정병호는 이 웃음을 억압의 산물이나 순수성의 표현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정동적·정치적·사회적 요소가 얽힌 다층적 행위로 읽어낸다. 웃음의 구조와 실천을 따라가다 보면 체제의 상징이나 이념적 기호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고투하며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이 또렷이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그는 북한 사람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신체와 등치하는 관습을 벗겨낸다.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북한을 이해하기 위한 책이지만, 그 이해의 방식이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저자가 보여준 것은 타자를 낯선 존재로 고립시키지 않고 역사와 관계, 감정의 결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맥락을 읽고 차이를 견디며, 그 속에서 공통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그의 태도는 곧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그가 떠난 지금,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타자의 삶을 이해하려는 윤리는 어떻게 가능하며, 다름을 적대가 아닌 배움과 공존의 가능성으로 읽는 감수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정병호의 글은 완결된 해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질문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그러니 1주기를 맞아 이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은 단순한 추모의 행위가 아니다. 분단과 적대의 언어와 정동이 더욱 굳어가는 시대에, 그가 남긴 ‘평화를 향한 시선’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그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조용히 일깨운다. 비록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렵더라도 타자를 이해하려는 작은 마음이 실천으로 이어질 때, 평화의 조건은 다시 구성될 수 있다고.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이수정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2025.12.2.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