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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칼럼] 빛의 혁명과 국민주권시대



백낙청

존경하는 이땅의 시민 여러분, 백낙청TV 시청자와 창비주간논평 독자 여러분,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2025년은 참으로 역사적인 한해였습니다. 윤석열의 12·3 내란을 민주적 시민들의 분투와 국회의 신속·단호한 대응으로 진압한 이후, 계속된 혼란과 격동 속에서도 대통령 파면과 이재명정권의 탄생을 이룩했습니다. 1987년체제를 뛰어넘을 2025년체제 건설의 든든한 구심점을 확보한 것입니다.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


시민혁명의 일차적 요구는 윤석열이 짓밟은 헌정질서와 법치의 회복이었습니다. 그 초보적인 목표가 달성되는 것만 보고도 세계는 한국민주주의의 ‘회복력’에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들 잘 모르는 점은 이 ‘회복’이 2016년 이래 꾸준히 지속되어온 촛불혁명의 일환이며, 혁명의 진행 중 일시적으로 발생했던 변칙적 사태의 종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빛의 시민들은 87년체제 수준이나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주의의 복원을 넘어,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요구했습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정부’를 자처하는 것도 그런 민의를 받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내란수괴와 그 공범들의 처단 같은 ‘민주회복’의 기본적 과제조차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있는 오늘의 현실도 그런 맥락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돌이켜보건대 1987년 민주항쟁은 1961년 이래의 군사독재를 끝장냈지만 1953년 이후 성립한 분단체제 자체는 허물지 못한 채 그 기득권세력과의 타협으로 이른바 87년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새 헌법의 제정이 신속하고 순조로웠던 까닭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어정쩡한 타협으로 끝날 일이 아님을 기득권세력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의힘은 거의 자포자기하여 온갖 말 안되는 소리를 만들어내며 어이없는 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살적인 언동이라도 국민의 짜증을 돋움으로써 시민혁명의 선한 기운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용서 못할 일입니다.


기득권세력과의 전선은 여야 간의 대립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내내 정치적 중립을 자처했고 한때 판사들이 주도한 ‘사법파동’으로 민주화에 이바지하기도 했던 사법부가 내란청산 방해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이에 대한 대증적 조치들을 넘어 한층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한 곽노현 「‘두더지잡기’식 사법개혁 멈추고 판을 키워라」, 『민들레』, 2025.12.20 참조). 이재명 대통령의 ‘사회통합’ 목표를 그가 단호히 거부하는 ‘미봉’으로 귀결시키려는 민주당 일각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찾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들조차 ‘한미협력’을 구실로 정부 내부에서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 또한 여야대결로 규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류 학계와 언론계 인사들의 ‘미봉주의적’ 체질은 더 말할 나위 없고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개혁과제로 꼽아온 정치개혁·입법부개혁 과제가 민주당 내부에서 거의 사라진 현상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정치개혁은 2018년 당시 검찰개혁과 더불어 양대 개혁의 하나로 추진했던 의제입니다. 그것이 용두사미가 된 까닭이 의회개혁의 관건인 국회의원 정족수 확대를 포기함으로써 ‘첫 단추를 잘못 낀’ 탓이라고 저는 봅니다만, 민주당과 우호 정당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현 22대 국회에서는 개헌 없이라도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등의 개정을 통해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는 과제입니다. 국힘을 원천적으로 제압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방안이기도 하지요.


거대 양당에만 유리한 온갖 제도적 장치를 없애거나 줄이고 의회의 민심비례성을 높이는 순간, 국힘이 노선을 달리하는 두세개의 정당으로 분화하는 일도 한결 쉬워질 겁니다. 다당제의 성립과 더불어 한국 정치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지방선거 압승의 꿈에 취한 민주당 지도부는 2028년 총선 전에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는 개혁들에 무관심해 보입니다. 물론 여당 의원들 중 일부와 조국혁신당 등 군소정당들이 정치개혁 의제를 고수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국회의원 정수 확대라는 기본에서 출발하여 얼마나 성과를 만들어낼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시민사회의 각종 정치개혁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국민주권을 넘어 민중자치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는 것도 국민주권시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시위현장에서 이미 드러난 문제이기도 합니다. 2024~25년 시위는 국민이면서도 국민 대접을 못 받아온 성소수자, 장애인 들—그리고 어떤 의미로 그들과 비슷한 처지를 실감해온 젊은 여성대중—의 존재감이 괄목할 만했는데 ‘국민’의 개념과 한계에 대한 문제제기도 알게모르게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오늘날 남한 주민의 적지 않은 수가 대한민국 국적이 없이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인구입니다. ‘국민주권시대’라는 것이 그들의 인권을 경시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의 ‘국민주권’ 사상은 ‘민중자치’라는 한층 보편적인 목표와 동시적으로 추구되어야 합니다. 민중자치 내지 민의 자치를 곧 직접민주주의로 좁혀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중자치도 아니었거니와, 아무리 교육이 보급되고 통신수단이 발달했다 해도 현대의 대다수 정치단위가 고대 아테네식 제도를 수용할 수 없음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민중 모두가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스스로 다스리며 살아간다는 아나키즘의 꿈도 이상주의의 냄새가 짙습니다. 이런 자치는 정산(鼎山) 송규(宋奎)가 말하는 도치(道治), 곧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본래 성품인 우주의 원리를 깨치게 하여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대도로 무위이화의 교화를 받게 하는 것”(『정산종사법어』 세전 제6장 국가, 원불교전서 744면)에 해당될 터인데, 종교인인 송규 선생은 오히려 ‘도치’와 더불어 ‘덕치’와 ‘정치’가 결합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원불교의 ‘지자본위(智者本位)’ 강령은 이런 결합을 원만하게 이뤄내는 ‘지혜’를 포함하는 것이며 이런 지혜의 다스림이 구현되는 세상이 민중자치의 세상이겠지요. 


따라서 국민주권 실현에 더하여 민중자치의 길에 나서는 시민들은 직접민주주의와 각종 대의정치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슬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입법부 개혁 등 중앙정치의 개혁은 물론이고, 여러 층위의 분권정치와 거기 걸맞은 수준의 직접민주주의 도입도 필요합니다. 또한, 어떤 의미로 정치권의 결정보다 시민의 일상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문화와 직장생활의 구체적 개선이 포함되어야 하며,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주민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민중자치’는 주어진 현장에서 철두철미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추구할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며 대동세상·개벽세상을 향한 염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큰 서원, 큰 공부로서의 변혁적 중도


변혁적 중도론 또한 과거의 이런저런 이념들을 대체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87년체제 아래 민주화의 성취와 한계, 그 한계를 초래한 사상적 빈곤을 두루 성찰하면서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에 대한 성실한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실용주의를 실행해보자는 일종의 서원(誓願)이자 공부심인 것입니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고 작년 신년칼럼(창비주간논평 2024.12.30)에서 주장하고 뒤이어 같은 제목의 저서(『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창비 2025)를 간행한 이후로도 주류 학계나 언론의 관심은 미미한 것 같습니다. 공감을 표하신 분들 가운데도, 우리 사회의 갈등이 워낙 심하니 서로 좋은 점을 인정하면서 좀더 조화롭게 살아가자는 선의의 노력 정도로 평가하는 분이 다수인 듯합니다. ‘선의의 노력’인 건 맞지요! 하지만 ‘변혁적 중도’에서 ‘변혁’ 곧 ‘분단체제의 변혁’이 간과되는 순간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갈등은 본디 분열하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이나 ‘국민성’ 때문이 아닙니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분단시대 내내 부당한 특권을 누려온 세력들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온 역사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 역사와 현실을 덮어둔 채로 선의의 발언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공부심의 부족이자 서원의 미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오늘날 남북관계는 꽉 막힌 답답한 상태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이재명정부가 바늘끝만 한 틈새라도 열어보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은 다행스럽습니다. 북측 또한 평화와 안정을 바란다는 점은 역설적이게도 윤석열이 입증해준 바 있습니다. 계엄의 빌미를 구해 국지적 충돌이라도 일으키려고 수없이 도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당국은 꿈쩍도 않았던 거지요. 북측이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새롭게 규정한 것 자체는 남과 북의 국가연합을 주장해온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에 오히려 가까워진 면이 있습니다(위의 졸저 11장 「한반도정세의 새 국면과 분단체제」 20~21면). 다만 평화공존 의지가 확고한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2019년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핵무력 불포기를 대전제로 전환한 북측의 입장을 돌이킬 수 있다는 식의 비현실적 기대를 접고, 한반도 실정에 근거한 실용적 해법을 새로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빛의 혁명이 마주한 어려움 중에는 한반도를 넘어 자본주의 세계체제 전체가 말기국면의 대혼란에 빠진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대혼란의 일부는 그나마 관리능력을 지녔던 주류 자유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중심부 국가들에서 대대적으로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합리적인 우파세력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극우의 독무대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 ‘우파 인터내셔널’이 있다면 그것은 곧 ‘극우 인터내셔널’에 가깝습니다.


그 일부에 해당하는 국내의 내란세력과 외국(특히 미국) 극우의 연대도 경계할 대상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한국의 극우는 여전히 만만찮은 위세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드물게 정부와 다수 시민의 버림을 받은 상태입니다. 국내 극우의 우두머리이던 윤석열은 내란의 우두머리로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으며 그의 핵심 동조자들도 다수가 구속되었고 통일교 지도부와 전광훈 목사 등 중요한 후원자세력이 수사대상에 오른 상태입니다. 그러다보니 ‘극우 인터내셔널’의 세계적 수장이랄 수 있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조차 한국의 극우세력보다 이재명 대통령과의 협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빛나는 성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동학의 ‘다시개벽’으로 시작된 한반도 후천개벽운동의 진전인 동시에, 대혼란기의 세계에 희망의 전초기지를 건설한 대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2025년에 우리가 성취한 국민주권시대에 안주하지 않되 정당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2026년이 안겨주는 일감과 공부거리를 기쁘게 감당해 나가십시다. 복 많이 짓고 많이 받는 한해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백낙청 /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2025.12.3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