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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AI 신드롬에 짓밟히는 노동과 생태



김상현



반도체·AI 신드롬이 한국을 휩쓸고 있다. 정부, 지자체, 여·야 정치권, 언론, 학계 할 것 없이 반도체·AI 산업에 범국가적 지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12·3 내란 이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반도체산업 지원 법안 발의에 경쟁적으로 나섰던 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문·사회 교육의 위축으로 학문 생태계 균형이 뿌리째 흔들리는 와중에도 반도체·AI 관련 학과와 교과목 신설·확대에 매진하는 대학 풍경은 또 하나의 예이다. 글로벌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유사한 분위기가 세계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지만, 반도체·AI 산업에 전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강박이 한국만큼 강한 곳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반도체·AI 산업은, 미래지향적 청정산업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회·정치·노동·환경·안전·보건 전반에 걸쳐 심각한 파급효과를 수반한다. 반도체 생산과 후공정은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노동자 건강 피해와 지역 환경파괴, 장시간 고강도 노동, 막대한 용수 공급에 따른 수생태계 교란과 수자원 불평등, 전력 대규모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 증가 등 광범위한 위험을 야기해왔다. AI산업도 마찬가지다. 일자리 대체와 고용 축소, 감시와 프라이버시 침해, 알고리즘 편향과 정보 왜곡, 군사적 오용 등 이미 널리 공론화된 이슈 외에도 데이터센터의 전력과 물 대량 소비로 기후위기가 심화되고 지역 공동체의 삶과 환경이 위협받으리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기술적 한계, 사업자의 탐욕이나 무책임으로 귀속될 문제가 아니다. 생명, 삶과 노동, 평등과 민주주의, 생태 지속가능성 등보다 기업의 이윤 확대와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정치경제 구조가 빚어낸 필연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형성된 반도체·AI 산업의 지배적 생산·소비 양식은, 노동과 자연을 동시적으로 잠식하는 착취적·추출주의적 사회-생태적 관계에 의해 지탱되고 이를 다시 재생산한다. 따라서 현재의 생산·소비 양식을 받아들이되 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는 기술적 처방을 통해 개별적·사후적으로 해소하면 된다는 발상은 문제를 한층 악화시킬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착취적이고 추출주의적인 반도체·AI 산업의 현 상황을 “흘러오는 거대한 수레”(2026년 1월 2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중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로 자연화·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생태 지속가능한 사회에 부합되는 생산·소비 양식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그에 답하는 것이다. 반도체·AI 산업을 위해 공적 자금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어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한 과정이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반도체·AI 신드롬 확산에 여념이 없는 이재명정부와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등 주류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026년 2월 3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도체특별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세액공제, 정책금융, 공공 R&D 투자, 노동·환경·지역·개발 규제 완화, 인·허가 특례, 용수·전력·교통·주거 인프라 구축, 인력 양성 등 반도체 기업에 대한 전방위적 지원을 정부와 지자체의 책무로 규정하고, 규제 간소화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반면 노동·건강·환경·기후 영향에 관한 평가, 규제 및 보호·관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엉뚱하게도 인력양성에 관한 제32조에 인력 확보 사업의 하나로 “작업장 환경의 개선, 근로자의 처우개선 등 복지 증진에 관한 사항”을 끼워넣고 있을 뿐이다.


여·야 합의 과정에서 주 52시간 예외 및 노동쟁의 절차 준수 조항이 제외되기는 했지만, 착취적·추출주의적 반도체 생산·소비 양식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근원적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반도체산업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위해 싸워온 반올림을 비롯하여 노동·보건의료·환경·기후정의·인권운동, 진보정당 등 80여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반대 공동행동’이 반도체특별법 반대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2026년 1월 22일 시행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하 AI기본법)과 그에 맞춰 제시된 「대한민국 인공지능 행동계획」(안)도 다르지 않다. 안전성과 신뢰성, 국민 권익과 존엄성 보호, 삶의 질 향상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초점은 AI산업 육성과 규제 완화(선 허용-후 자율규제)에 있음이 자명하다. 디지털정의네트워크 등 17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서가 비판하고 있듯 이들은 AI산업의 사회·정치·노동·환경·안전·보건 영향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모호한 ‘인공지능윤리’만을 강조하고 있다. AI기본법, 행동계획(안)과 하위법령집 어느 곳에도 AI산업과 데이터센터의 전력·물 소비가 기후·생태계 및 지역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AI산업의 지배적 생산·소비 양식은 검토 대상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재명정부는 첨단전략산업기금 75조원 등 150조원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반도체·AI 산업에 50조원 이상 투자할 것을 공언하고 있다. ‘K-칩스법’(기업의 반도체·AI R&D와 시설 투자에 세제 혜택을 강화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등 조세 감면과 기존의 정책금융까지 감안하면 이 분야에 대한 한국사회의 재정 지원은 실로 전폭적이다. 그 정도 규모의 지원이라면 대상 기업에 노동·건강·기후·환경·인권 및 지역공동체와 관련된 책무가 부과될 법도 한데, 최근 비수도권 투자 조건이 거론된 것 외에는 감감무소식이다. 오히려 정부는 ‘반도체 세계 2강’과 ‘AI 3대 강국’ 도약을 명분으로 각종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가 하면, 친환경에너지 전환에 역행하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을 위한 초고압 송전선로와 송전탑 건설에 이어, 2026년 1월 26일에는 또다시 반도체·AI 산업을 빌미로 윤석열정권이 계획했던 신규 대형원전 2기와 소형모듈러원전 1기 건설을 확정하기도 했다.


이같은 무조건적 지원은 산업 균형발전과 조세정의를 저해할 뿐 아니라, 공적 자원의 사적 전유와 필수 규제의 약화를 통해 인권·복지·돌봄·의료·교육·환경·안전 등 사회-생태적 공공성의 물적·제도적 기반을 크게 위협한다. 진보적 경제학자 가보르(Daniela Gabor)는 EU 그린딜산업계획(GDIP)의 분석에서, 국가 산업정책이 노동권, 생태 지속가능성 등 공익의 증진보다 에너지를 포함한 공공 부문의 사유화, 사기업의 이윤 보장, 사적 투자 위험의 사회화라는 ‘디리스킹 국가’(de-risking state)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국가의 개입이 투자성(investability)의 창출을 정치·사회·경제 전 영역의 핵심 작동 원리로 고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특별법, AI기본법과 이재명정부의 반도체·AI 산업정책은 이른바 ‘기본사회’보다 가보르가 말한 디리스킹 국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한국사회의 반도체·AI 신드롬은 단지 첨단기술에 대한 열광이 아니다. 기술혁신과 신산업 육성으로 기업의 이윤과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GDP를 높여 ‘선진 강국’에 이르는 것을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발전민족주의·성장주의와 디리스킹 국가의 결합이 반도체·AI를 매개로 구체화된 것에 다름 아니다. 두려운 것은 노동과 생태를 짓밟는 이 신드롬이 한동안 지속되리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대한 수레”에 맞서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생태 지속가능한 대안적 반도체·AI의 생산·소비로의 전환을 집요하게 주장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인권보호와 책임성 강화, 작업장 환경 개선과 알권리 보장, 노동권 준수와 노동조건 향상, 고용안정, 지역공동체 기여와 생태계 보존, 재생에너지 이용, 온실가스 배출 감축과 지속가능한 물 관리 등의 사회-생태적 책무가 전제되지 않는 한 반도체·AI 산업에 대한 공적 지원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반도체특별법, AI기본법과 행동계획(안)의 전면 재검토 요구는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김상현 /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2026.2.10.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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