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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의 현재성: 극단적 정치의 극복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하여



최정기


‘5·18 기억전쟁’은 항쟁이 짓밟히던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진입하는 계엄군을 피해 전남도청과 YWCA 건물에서 뛰어나오던 학생들과 청년들은 그 다급한 순간에도 항쟁 기간 사자후로 터져나왔던 시민들의 성명서와 선언문들을 챙겼다. 항쟁 기간을 고스란히 담은 국내외 사진기자들은 필름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심초사하였다. 이들이 고통을 감내한 이유는 단 하나, 5·18의 진상을 이후 세대들에게 알리고 (비록 1980년 당시에는 패배했더라도) 역사적으로는 승리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5·18 기억전쟁은 ‘5월운동’이 되었다. 


5·18 기억전쟁의 동력, 5월운동의 에토스(ethos)는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었다. 국가테러를 마주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저항하지 못하고 피신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이었다. 항쟁에 참여했으나 죽음에서 비켜난 사람들이 ‘죽은 자들’에게 갖는 부끄러움이었으며, 5·18을 몰랐던 사람들이 점차 그 진상을 알게 되면서 생겨난 부끄러움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5월운동 참여를 통해 부끄러움이라는 빚을 덜고자 했다.


그런데 5월운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는 ‘과거사정리’ 혹은 ‘과거청산’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2000년 전후에는 ‘이행기 정의’(국가권력에 의한 폭력 문제 청산을 다루는 폭넓은 과정과 원칙)라는 개념이 회자됐다. 물론 용어의 등장은 5·18이 5월운동으로 재평가되며 동시에 과거의 국가테러 사건들까지 쟁점화된 것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과거사정리, 이행기 정의 같은 말은 마치 국가테러 사건이 현재와는 관련이 없는 과거의 일이며, 가해자-피해자 관계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5·18 국가테러와 민중항쟁은 역사적, 구조적 사건으로 우리나라의 현대성이 가진 문제가 표출된 것이다. 따라서 ‘변혁적 정의’의 입장에서 장기적으로 형성된 불평등과 부정의의 원인을 규명하고, 공동체 중심의 지속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5·18의 경우 과거청산을 위한 ‘제도 만들기’에 그치지 않고 5월운동이라는 ‘역사 만들기’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사정리로 한정한다면 5월운동은 많은 것을 이뤄냈다고 볼 수 있다.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으며, 피해자에게는 경제적 보상과 명예회복이 주어졌다. 망월묘역의 국립묘지화, 옛 도청과 영창의 복원 등 각종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으며, 5·18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검찰의 해괴한 논리를 깨부수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전두환을 비롯한 5·18 국가테러의 주범 14명은 실형을 받았다. 


그런데 노태우정권은 물론이고 김영삼정권마저도, 심지어 김대중정권까지도 과거사정리의 가장 중요한 토대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생략한 채 보상과 기념사업만으로 5·18을 정리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 등 가해세력은 지역감정 해소와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어떠한 진상규명 절차나 참회도 없이, 수감된 지 2년여 만에 사면되었다. 


한편 5월운동 세력에게 이 과정은 반공·분단·독재체제를 구성했던 거대한 지배세력과의 대결 및 투쟁의 연속이었다. 1993년 2월, 광주지역 사회운동 세력과 5월단체들은 ‘5·18 해결 5원칙’(진상규명·책임자처벌·명예회복·배상·기념사업)에 합의했다. 또 이들은 국가의례나 보훈업무와는 무관하게 ‘5·18 정신’을 계승하는 5월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백명의 피해자가 모은 보상금 일부와 시민 모금을 종잣돈 삼아 5·18기념재단을 설립했다. 5·18기념재단은 지금까지 여러 유무형의 기념사업을 추진해왔으며 나름대로 변화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5·18 과거사정리를 역사 만들기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보상과 기념사업 중심의 청산 개념으로 본 결과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첫째, 5월 운동 내에서 당사자주의가 강화되었으며 5·18의 기억조차도 유족·부상자·구속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둘째, 5‧18 관련 특정 기억이나 기념시설을 물신화하는 경향이 있어 기념의 과잉이나 엄숙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진상규명 없는, 그리고 철저하지 못한 책임자처벌의 결과 2000년을 전후하여 수구세력들의 5·18 왜곡 및 폄훼도 나타났다. 이들이 집요하게 5·18을 왜곡하며 ‘5·18 북한개입설’을 떠들어대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이들은 5·18의 기억을 5공 시절로 되돌리는 것이 이른바 종북·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튜브채널이나 집회 등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며 상당한 경제적 이윤을 얻기 때문이다. 


5·18은, 1980년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가테러에 대한 반작용을 넘어서 그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능동적인 힘이다. 하지만 5월운동은 점차 제도화되었다.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되었으며, 피해자들은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5·18의 역사 만들기는 그 수명을 다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5·18이 비조직적인 민중항쟁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시민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 그리고 자생적인 시민군이 항쟁의 주역이었던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주먹밥을 싸주던 시장 아주머니, 헌혈의 대열과 궐기대회에 참여했던 시민들, 항쟁에 필요한 물품과 노동력을 제공했던 사람들, 집에서 숨죽이며 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생사를 걱정했던 시민들도 모두 항쟁의 주역이다. 


5·18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부나 일부 집단들이 주도하는 제도나 유형시설과는 별도로, 혹은 그것들과 함께 민초들이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포함해야 한다. 2024년 12월 3일의 내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5월운동이 여전히 역사 만들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새로운 세대들이 과거 국가테러와 민주항쟁의 현장들을 방문하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 역시 5월운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2024∽25년의 남태령과 광화문의 응원봉 집회는, 비록 형태는 다를지언정 1980년 광주지역의 민중항쟁과 도청 앞 광장의 궐기대회 그리고 광주시로 몰려들던 전남 각 지역의 시위대와 맥을 같이 한다. 5·18은 하나의 형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합적인 전체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저항 흐름이 현실적 조건들을 뛰어넘어 독재 및 국가테러에 저항한 역사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로는 충족되지 않는 수많은 과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중요한 에토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최정기 / 전남대 명예교수, 5·18국제연구원 원장


2026.5.12.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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