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도시의 나무도 노동자다



우종영


그리스 테살리아의 왕 에뤼식톤(Erysichthon)은 ㅇ신들을 무시한 오만한 자였다. 그는 숲의 상징이자 요정들의 안식처였던 떡갈나무를 베어내라 명했다. 도끼날이 박힐 때마다 나무에서 피가 흐르고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탐욕에 눈이 먼 그는 기어코 나무를 쓰러뜨렸다. 그 댓가로 ‘끝없는 굶주림의 저주’를 받게 된 에뤼식톤은 허기를 채우지 못해 결국 자신의 몸까지 뜯어먹으며 파멸하고 만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기록한 이 신화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도시에서도 재현된다. 가로수나 오래된 나무들이 베어지거나 인간의 편의를 위해 소리 없이 독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인간이 빚어낸 정제된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최근 서울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 예술의 이면에 자리한 인간 중심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환기미술관은 수령 백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밑동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맹독성 독극물을 주입해 나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CCTV에 포착된 이 행위는 미술관의 지시 아래 이루어졌다. 미술관은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나무뿌리로 인해 담장이 붕괴할 우려가 있었고, 다수의 시민이 이용하는 시설로서 방치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사유지에 얽혀 벌목이나 이식이 어려웠다는 행정적 고충도 토로했다. 그러나 제도적 한계를 공론화하여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안식과 즐거움을 주었던 생명을 죽인 것, 그것도 예술공간의 담장 너머에서 독극물이라는 불법적 수단을 동원한 행위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나무쯤은 언제든 제거할 수 있다는 오만한 태도다.

 

이러한 폭력은 특정 미술관의 일탈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의 일상적인 거리로 시선을 돌리면, 행정기관에 의해 자행되는 생명 경시를 목격할 수 있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벌어진 가로수 교체 사업이 그 예다. 마포구는 ‘녹색 특화거리 조성’이라는 명목 아래, 수십년 된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면서 지자체는 기존의 나무들이 상점 간판을 가리고 가을마다 은행 낙엽과 열매가 악취와 민원을 유발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가로수의 존재 이유는 상권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에 있지 않다. 삭막한 도시에서 숨을 쉬기 위해서는 가로수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여름철 열섬현상을 완화하고, 미세먼지를 저감하며, 공기를 정화하는 것이 도시 나무들의 역할이다. 이들은 시민들의 쾌적한 삶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노동을 수행한다. 인간은 이들을 ‘가로수’나 ‘조경수’로 부르지만, 생물학적·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나무는 도시의 환경을 유지하는 노동을 댓가 없이 감당하는 중이다. 나무야말로 도시가 오래 기대어온 ‘생태 노동자’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의 처우는 어떤가.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급여와 산업안전보건법 등으로 최소한의 생계나 안전이 보장되었을 노동이지만, 도시의 나무들에게는 그런 보호조차 없다. 해마다 가지들은 무참히 잘려나가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갇혀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며, 매연과 먼지 속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다.


지자체들의 기형적인 소나무 사랑은 도를 넘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마저 벌이고 있다. 마포구 월드컵북로나 노원구 동일로에 가보면 양버즘나무 아래 소나무(반송)를 욱여넣듯 심어놓았다. ‘인종지덕 목종지패(人從之德 木從之敗)’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큰사람 밑에서 덕을 보지만, 나무는 큰 나무 아래 있으면 햇빛을 보지 못해 죽는다는 뜻이다. 소나무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처사다. 결과는 참담했다. 마포구 삼개로에 심어진 소나무 54그루 중 무려 25그루가 식재된 지 석달도 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 고사했으며 양버즘나무 밑의 반송은 잎들이 말라가고 있다. 이들도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식물신경생물학자인 앤서니 트레와바스(Anthony J. Trewavas)는 식물에게도 ‘지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중추신경계라는 중앙 서버만 없을 뿐, 주어진 환경을 인식하고 살아남기 위해 매순간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두뇌도 없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신경세포의 불꽃놀이 같은 고통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감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지각하는 방식은 자신만의 ‘체화된 공감’에 기인하므로 인간과 다른 감각구조를 가진 나무의 고통을 유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해서, 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제 우리는 나무들에 대한 최소한의 처우 기준을 논해야 할 때를 맞이했다. 지자체는 나무들이 수행하는 노동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조례, 즉 무분별한 강전정을 제한하고 가로수 생육 공간의 최소 면적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법적 기준을 제정해야 한다. 이는 식물에게도 인권을 부여하자는 감상적인 주장이 아니다. 도시의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함으로써 시민의 쾌적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권리의 확장이다.


독극물이 주입되어 잎을 떨어뜨린 은행나무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붉게 타들어가는 도심의 소나무들은 현재 우리 도시가 앓고 있는 중병의 징후다. 담장에 금이 갔다고, 간판을 더 잘 보이게 하려고, 낙엽을 쓸어 담는 수고로움을 피하려고 무턱대고 나무를 죽이는 행위는 에뤼식톤의 도끼질과 다를 바 없다. 나무를 제거하여 얻어낸 삭막한 콘크리트의 열기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우리의 숨통을 조여올 것이다. 나무라는 동료 노동자를 잃고 회색빛 이기주의만 남은 도시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옥죄는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아름다운 도시, 살고 싶은 도시는 살육의 현장이 아니라 온갖 생명들이 함께 사는 공간이다. 나무들의 노동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일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종영 / 국가유산 수리기술자


2026.7.22. ⓒ창비주간논평

커버이미지: ⓒ종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