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정치권력이 영화비평을 대체할 때:
암살자(들) 논란에 대하여
정병기
2026년 9월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국민의힘 일부 인사들은 불매운동과 상영중단, 감독의 국정감사 출석을 거론했다. 나아가 당은 소속의원 전원 명의로 싱가포르 국제영화제에 개막작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서한까지 보냈다. 비판의 대상은 스크린 속 재현에서 제작과 유통, 관객의 접근 가능성 자체로 옮겨갔다.
영화는 흔히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로 이해된다. 그러나 영화는 스크린에 비친 사실에 머무르지 않는다. 감독이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듯 평론가뿐만 아니라 관객도 해석과 논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특히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할 때 영화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해관계와 당사자성에 부딪힌다. 이때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represent) 작품인 동시에 의사를 표현하는(express) 현상으로서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 된다. 최근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도 이런 의미에서 영화가 만들어낸 또다른 사건이다.
하지만 어떤 현상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정당하다는 판단은 다르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가능한 한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지적할 수도 있고, 허구적 재현이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침해한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한 문제제기는 비평과 공론장의 일부이며, 시민의 불매도 자유다. 정당한 권리구제의 길 역시 열려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작품의 옳고 그름을 선고하고 상영 자체를 막으려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평이 권력의 압박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암살자(들)」은 1974년 8·15 저격사건을 다루지만, 그 핵심은 단순히 누가 육영수 여사를 쏘았는가에 있지 않다. 영화는 총탄과 수사기록에 얽힌 의문을 따라가는 형사와 기자를 통해 유신체제의 언론통제와 진실의 은폐를 드러낸다. 사건은 언론탄압이라는 더 큰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적 출발점인 셈이다. 제목의 괄호 속 복수형은 또다른 총격범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진실을 가로막는 여러 권력의 얼굴로도 읽힌다. 그렇기에 영화가 묻는 것은 암살자의 신원만이 아니라 누가 진실의 발화를 허락하고 금지하는가의 문제다.
영화적 재현에 문제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화는 문세광(영화 속 문태광)의 범행과 현장의 의문, 중앙정보부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 정권의 언론탄압을 하나의 추적 서사로 엮는다. 이처럼 사실과 의혹을 드라마의 인과관계로 재조직하는 일은 영화의 힘이자 위험이다. 가설이 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의혹이 있다는 사실이 특정 배후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박정희정권이 사건을 기획했다는 주장 역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영화가 이런 가설에 어느정도 개연성을 부여했는지는 연출의 윤리와 서사의 설득력이라는 차원에서 따져볼 문제다.
증거의 층위를 살펴보면 그 간극이 분명해진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수록한 1974년 수사본부 발표에는 문세광의 권총에 장전된 다섯발 가운데 네발이 사용되고 한발이 남았다고 적혀 있다. 반면 영화는 ‘여섯번의 총성’과 ‘사라진 두발’을 추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전체 총성과 문세광의 발사 횟수, 회수된 탄환의 수는 서로 다른 정보다. 당시 발표를 무오류의 진실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지만, 기록의 빈틈 자체가 정권의 공모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미학적 쟁점은 이 간극을 메우는 방식에 있다. 철구의 수사와 재환·영일의 취재가 교차편집되며 별개의 의문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쌓인다. 관객은 단서의 증명력보다 인물들의 추적에 몰입한다. 추격 장면의 타자기 소리는 수사의 긴장을 ‘말할 수 없는 시대’의 감각으로 바꾼다. 후반부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허구에 역사적 실재감을 더한다. 범인을 확정하지 않는 결말에도 의심은 이미 특정 방향으로 조직된다. 열린 결말이 곧 열린 해석은 아니다.
선악의 배치도 단순하다.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일부 경찰 지휘부는 억압의 편에, 형사와 기자들은 저항의 편에 선다. 이 선명한 구도 속에서 권력기관 내부의 복잡한 균열은 희미해지고, 국민은 역사를 만드는 주체라기보다 동원되는 대중으로 남는다. 당대에 떠돌던 의혹과 민중의 불안이 능동적인 목소리를 얻지 못한 점도 아쉽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장면과 서사, 역사적 재현을 분석하는 영화비평의 언어로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곧 상영금지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실제로 허진호 감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영화 속 의혹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과, 그 의혹을 제기하는 영화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이것을 법률상 사전검열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의회와 공적제도의 영향력을 앞세워 제작자와 상영자에게 불이익을 예고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검열적 압박이며 창작과 비평을 위축시키는 행위다. 포털에서 비정상적 관람평 조작 정황이 포착되고, 평론가의 리뷰 영상까지 비공개로 바뀌었다. 배우와 평론가에게까지 공격이 확산된 상황에서는 영화를 옹호할 자유뿐 아니라 영화를 비판할 자유마저 진영의 허가를 받게 된다. 국가권력의 언론통제를 고발하는 영화가 현실에서 정치적 발언의 통제를 경험하는 역설도 여기에 있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은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그린 보더」가 겪은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난민 위기와 국가폭력을 고발한 이 영화 역시 개봉 전부터 우파 정치인들의 공개 비난, 온라인 평점 테러, 감독 개인에 대한 정치적 공격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향한 공격이 상영을 막지는 못했으며, 법원도 이 공격이 예술적 작업에 대한 침해라고 판결했다. 정치권의 과잉 공격이 오히려 영화를 폴란드 사회의 핵심 논쟁으로 끌어올리고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했다.
문제의 핵심은 「암살자(들)」이 역사적으로 완벽한 영화인가에 있지 않다. 어떤 영화든 부정확할 수 있고 비판받을 수 있다. 오히려 이번 논란에서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어떤 자격으로 그 비판을 행사하는가이다. 정치가 영화비평을 대체하고 권력이 상영 여부까지 결정하려 한다면, 영화의 진실을 따질 공론장부터 사라진다. 역사 영화의 자유는 비평의 자유와 함께 지켜져야 한다. 그 두 자유를 구별하면서 동시에 지키는 일, 그것이 이번 논란이 남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정병기 / 영화평론가
2026.10.21.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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