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제목 대신 무게로 남은 책들:
AI에 출판 생태계를 맡길 수 없다
권오현
2026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이 승인한 한 합의의 대상 도서 목록에 한국 작가들의 이름이 올랐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김영하의 『빛의 제국』 등 스무종 남짓이다. 대부분 영어 번역본으로,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이 챗봇 ‘클로드’를 만들면서 라이브러리 제네시스 같은 불법 복제 사이트에서 내려받았다고 알려진 책들이다. 우리 작가들의 책이 AI 학습에 무단으로 쓰인 사실을 남의 나라 법정 문서로 알게 된 셈이다.
이 사건 ‘바츠 대 앤트로픽’에서 법원은 책을 두갈래로 나눴다. 2025년 6월 윌리엄 알섭(William Alsup) 판사는 앤트로픽이 종이책을 사서 스캔해 학습에 쓴 것을 공정이용(fair use)으로 판단했다. 반면 해적판 700만권 남짓을 공짜로 내려받아 영구히 쌓아둔 일에 대해서는 공정이용의 모든 요소가 불리하다고 봤다. 이 대목이 재판으로 넘어가자 앤트로픽은 약 48만종에 권당 약 3천 달러, 모두 15억 달러를 내고 내려받은 파일을 없애기로 합의했다.
혹자는 공정이용의 근거가 생겼다며 인용하지만, 이 판결로 AI 학습이 합법이 된 것은 아니다. 알섭 판사의 판단은 좁게 읽어야 한다. 정식 재판 전에 지방법원 한곳이 내린 약식판결이고, 효력은 이 사건 원고들의 청구에 그친다. 사건이 합의로 끝나 항소심의 검토도 받지 못했다. 원고들이 AI의 출력물이 원작을 침해했다고 다투지 않아, 법원은 학습에 들어간 입력만 보았다. 이틀 뒤 같은 법원의 빈스 차브리아(Vince Chhabria) 판사는 메타 사건에서 다른 길을 갔다. 메타 역시 불법 복제 사이트에서 책을 내려받아 학습했지만, 차브리아 판사는 내려받기와 학습을 따로 떼어 보지 않고 하나의 이용으로 묶어 공정이용을 인정했다. 다만 그 이유는 원고 쪽 증거가 부족한 데 있었다. AI가 비슷한 글을 쏟아내 원작 시장을 묽게 만든다는 ‘시장 희석’이 가장 유력한 논거인데 원고 작가 13명이 그 증거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는 판결의 효력을 이 13명의 사건에 묶어두고, 증거를 갖춘 다른 원고라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디지털 복제 도서 학습은 미국에서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문제이고, 우리 법정은 우리 저작권법의 공정이용 기준으로 따로 판단한다.
15억 달러 합의로 쟁점이 정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다. 합의는 2025년 8월까지의 과거 행위를 정리한 것이고, 앞으로의 학습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출력물에 대한 청구도 밖에 남겼다. 조달, 스캔, 학습, 표출, 인용까지 단계마다 쟁점이 따로 있는데, 이 합의가 닫은 것은 해적판 조달 하나이다. 합의는 미국 저작권청에 제때 등록된 책만 받았으니, 미국에 따로 등록하지 않은 한국 책은 구제의 문 밖에 선다. 종이책을 사서 스캔하는 조달은 합의와 무관하고, 알섭 판사의 공정이용 판단도 미국 법정의 이 사건에 그친다. 하지만 앤트로픽은 판결 전인 2024년부터 종이책을 사들였고, 국내 도매상을 통해 일곱차례에 걸쳐 165.69톤의 한국 책을 실어 갔다. 교보문고와 예스24, 알라딘에도 해외업체의 대량 구매 문의가 잇따랐지만, 세곳 모두 거래로 이어지지 않았다. 수출 기록에는 제목도 저자도 없이 무게만 남았다. 작가에게는 영혼의 분신 같은 글이 그램으로 매겨져 한데 묶여 알 수 없는 곳으로 실려나간 것이다. 이는 불법이기 이전에 이를 막을 규칙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생태계를 지키려면 바로 이 빈틈을 두고 싸워야 한다.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을 출판계가 호소문에서 든 세가지 요구를 따라 살피고, 둘을 더 보태어보려 한다. 첫째, 이용허락 원칙이다. 정부의 ‘대한민국 인공지능 행동계획’은 학습 거부 표시가 없는 저작물을 적법한 접근 아래 먼저 쓰고 나중에 보상하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관련 법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정부의 ‘공정이용 안내서’도 참고자료에 머물러 있다. 출판계는 허락이 먼저라고 요구한다. 바깥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영국정부는 올해 3월 거부 표시가 없으면 먼저 쓰게 하는 예외를 선호안에서 내렸고, 호주도 지난해 10월 같은 예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저작권은 표시 없이도 생기니, 표시가 없는 책을 허락받은 책으로 보는 순간 표시는 거부를 강요하는 장치가 된다. 웹사이트와 전자책 메타데이터의 학습 유보 표시는 권리를 알리는 수단으로 써야 한다. 국내에도 전례가 있다. 국립국어원의 AI 학습용 말뭉치 사업에 출판계 추산 1만 6천여종의 전자책이 허락 없이 들어갔고, 올해 7월 법원은 용역사의 공정이용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째, 투명성이다. 한국출판인회의의 호소문 그대로 “알 수 없으니 묻지도, 거절하지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도 못한다”는 것이 지금의 처지이다. 이번 해적판 사용도 소송이 내부 문서를 열고서야 드러났고, 행동계획이 전제한 ‘적법한 접근’을 누가 확인할지도 비어 있다. 유럽연합은 범용 AI 기업에 학습 데이터 요약을 공개하도록 했고, 유럽의회는 올해 3월 학습에 쓴 저작물의 항목별 목록까지 요구했다. 공개만으로 학습이 허락되지는 않지만, 권리자가 물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셋째, 정당한 보상이다. 한국출판인회의가 출판사 188곳을 조사한 연구에서 93.6%가 보상 체계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65.9%가 공동 협상에 찬성했다. 번역본에는 작가와 번역가, 해외 출판사의 권리가 겹치니, 저작자·출판사·번역자 사이의 권한과 배분을 미리 정하고 함께 협상할 창구를 만드는 일이 보상의 출발이다. 미국 저작권법은 제때 등록한 저작물에만 법정손해배상과 변호사 비용을 청구하게 하니, 해외에 책을 내는 출판사는 등록부터 챙겨야 한다. 정식으로 이용을 허락받을 길이 있으면, 허락 없이 쓴 쪽이 공정이용을 주장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넷째, 여기에 증거와 역량 확보를 보태고 싶다. 차브리아 판사가 열어둔 시장 희석의 문을 지나려면 AI가 우리 책을 얼마나 재현하고 우리 책 시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자료로 보여야 한다. 세 요구를 법과 협상자리에서 관철하는 힘도 이 증거에서 나온다. 출판사와 작가가 함께 쌓아야 할 역량이다.
다섯째, 쟁점은 학습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델이 책을 그대로 재현하는 표출, 답변에 출처를 밝히는 인용, 검색·요약·번역처럼 책을 불러다 쓰는 서비스까지, 어디까지가 정당한 사용인지 정의가 필요하다. 독일 법원은 지난해 11월 오픈AI 모델 안에 노래 가사가 그대로 담긴 것을 복제로 봤고,¹ 미국에서는 오픈AI 산출물이 원작을 침해했다는 작가들의 청구가 재판으로 넘어갔다.² 이 모두가 AI 시대에 지식 생태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중요한 논의이다.
15억 달러는 해적판 한가지에 매겨진 값이다. 종이책을 사서 스캔하는 길, 디지털 복제본으로 배우는 길, 그 학습에서 나오는 이익을 누가 나눌지는 모두 열린 질문으로 남았다. AI 발전에서 정당한 이용은 정당한 보상과 함께 가야 하고, AI 생태계의 성장은 국내 지식 생태계의 성장과 함께 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먼저 쓰고 나중에 보상하는 길부터 열겠다고 하면서도, 학습 목록을 물을 권리 하나 세우지 못했다. 나라마다 법이 다른 틈을 두고, AI 경쟁 국면에서 저작권 침해는 감수할 ‘부수적 피해’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책이 누구의 학습재료가 될지를 누가 정하는가. 다음에 실려나갈 책의 목록은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한다.
지식과 통찰은 인류가 어렵게 만들어온 영혼의 정수이다. “책이 없으면 AI도 없다”는 출판계의 호소는 출판산업의 이해를 넘어 우리 미래를 가르는 메시지이다. 온갖 생태계를 잡아먹으며 크는 초지능이 약속하는 희망적인 미래는, 그 실현가능성을 차치하더라도, 공동의 번영과 공동의 관리, 공동의 소유라는 토대를 세우는 데서 출발해야만 한다. 지식과 경험을 만들어낸 이들이 그 열매를 함께 누리고, 쓰임을 함께 정하고, 결과물을 함께 소유하는 생태계를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 싸움은 구체적이다. 학습에 쓴 책의 목록을 공개하게 하는 법, 표시가 없는 책을 허락한 책으로 보지 않는 원칙, 저자·출판사·번역자가 함께 협상하는 창구, 시장 피해를 입증할 자료, 그리고 무엇에 쓰일지 묻지 않고 책을 내보내는 유통의 빈틈을 메우는 규칙이다. 책 한권의 가치를 따져 묻고, 그 가치를 지키는 시스템과 정책을 만드는 데서부터 출발하자.
¹ GEMA v. OpenAI, LG München I, 42 O 14139/24 (Nov. 11, 2025) (미확정); “GEMA vs. OpenAI: Munich Regional Court I issues landmark copyright decision,” CMS 2025.11.19.
² In re OpenAI Copyright Infringement Litig., No. 25-md-3143 (S.D.N.Y. Oct. 2025) (motion to dismiss denied in part); “Authors’ Copyright Battle Against OpenAI Survives Motion to Dismiss,” Banner Witcoff 2025.10.30.
권오현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대표
2026.10.28.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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