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셰익스피어와 세르반떼스에게 던지는 물음 하나
*이 글은 칠레 출신의 소설가이자 미국 듀크대학 교수인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이 셰익스피어와 세르반떼스 공통의 400주기인 올해를 보내는 단상을 담은 에세이입니다(원제 “A Question for Shakespeare and Cervantes”). 미국의 계간지 The Threepenny Review 2016년 가을호에 실린 이 글을 창비주간논평에 번역 소개합니다. [ ] 안의 보충설명은 모두 옮긴이의 것입니다.
1616년 늦은 4월, 두 사내가 마드리드에서, 그리고 스트랫퍼드어펀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각각 임종을 맞이하고 있을 때, 누가 그들을 방문했을까? 누가 그들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최후의 물음을 속삭였을까?
우리 자신의 죽음 이야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할 수 없는 유일한 경험이다. 언어를 다루는 신과 같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세르반떼스(M. de Cervantes)와 셰익스피어(W. Shakespeare)가 죽음이라는 저 절대법칙을 피할 수 없다면, 그들이 죽어갈 때 그들 마음속에 정확히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우리가 전혀 알 길이 없다면, 그 시대의, 아니 어쩌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문학의 두 거장의 동시에 벌어지던 그 마지막 순간을 엿듣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기는 힘들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살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바로 그 상상력을 활용하는 문제이다. 그 상상력의 유산 덕분에 우리는 임종을 맞이한 이 작가들에게 찾아든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우리는 누구를 택하여 미겔 데 세르반떼스가 죽을 때 우리 대신 그에게 다가가게 할 것이며 또 누구를 택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뭔가를 속삭이게 할 것인가? 그 순간에 끼어들도록 누구를 초대할 수 있을까? 훌쩍대는 친척들, 열렬한 성직자들, 호기심 많은 구경꾼 나부랭일랑 아예 생각도 마시게.
다른 이여야 한다. 이 작가들이 최후의 숨을 쉴 때 다정한 동행이 될 이는.
세르반떼스의 경우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돈 끼호떼가 뽑혀서 그를 만든 창조자에게 그 마지막 질문을 할 것이고 자신과 시종을 라 만차 평원으로 힘차게 떠나게 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몽상가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땅에서, 오락거리 말고는 그들이 전혀 소용없는 세상에서 모험을 찾아 나서게 한 바로 그 남자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늘 호기심 넘치던 돈 끼호떼는 우선 많고 많은 그의 미래 독자들이 무엇을 궁금하게 여길지 알아내고 싶어했을 것이다. 가령 불운과 참담의 격랑을 겪은 퇴역군인[세르반떼스는 1571년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치러진 터키 제국과 에스빠냐 제국의 ‘레빤도 해전’에 참전, 부상을 당하는데 귀국길에 터키 해적에게 납치당해 고문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난다]이 어떻게 이렇게나 유쾌한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환상과 슬픔의 잿더미에서 희망을 빚어낼 수 있었을까? 혹은 세르반떼스가 만들어낸 그 늙은 사내, 키 크고 비쩍 마른,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현자와 같은 돈 끼호떼는 몹시도 괴로운 혼란한 시대에, 수백년 후 우리 인류가 직면한 것과 똑같은 딜레마 앞에서 자기 동포들을 이끌어줄 어떤 지혜를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끌어내고 싶어했을 법하다. 하지만 ‘슬픈 얼굴의 기사’[돈 끼호떼를 가리킴]는 자신의 저자에게 정말 완전히 중요한 것에 관해, 자신이 구상되었을 때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어떤 것에 대해 저자에게 물어볼 이 한번의 기회를 날려버릴까 두렵다. 그는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험임을 안다. 정의를 위한 그렇게나 많은 좌절된 싸움과 실패한 모험을 겪은 후, 돈 끼호떼는 저 최후의 과업을 결코 그르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경우, 그의 무대에는 인기 있는 인물들이 너무 많기에 임종의 그날 그중 누가 등장할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시인’[Bard, 셰익스피어의 별칭]은 폴스타프, 로잘린드, 줄리엣, 미란다, 그리고 퍽[각각 『헨리 4세』 『뜻대로 하세요』 『로미오와 줄리엣』 『템페스트』의 등장인물]을 미소로 맞이하지 않겠는가? 리어와 맥베스, 오셀로와 말볼리오[『십이야』]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저자의 해명을 요구할 법하다는 걸 그가 이해하지 않을까? 아니 셰익스피어는 프로스페로[『템페스트』]를 자기 섬에서 데려와서, 그가 음악과 마법으로 이 작별을 편안하게 해준다면 고마워하지 않을까?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선택을 하게 된다면(어둠이 내릴 때 그도 외로움을 물리치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한 후보가 도드라진다. 덴마크 왕자이다. 돈 끼호떼처럼 광기를 부리는 또 한 사람, 햄릿은 자기 창조자가 남긴 끝없는 수수께끼의 심연으로 빠져들고플지 모른다. 왜 코델리아[『리어왕』]를 살려두지 않았는지, 오필리아[『햄릿』]는 왜 물에 빠져 죽어야만 했는지, 어찌하여 데스데모나[『오셀로』]의 사랑은 그다지도 맹목적인지 물을 수 있겠다.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존재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다. 가톨릭 신자였는지, 사라진 몇해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쏘네트를 쓰도록 영감을 준 이는 누구였는지. 하지만 죽음의 어스름한 그 시간은 그런 것들을 물을 때가 아니다. 침묵만이 남기 전, 기록된 시간의 음절들이 흘러가면서 중요한 단 하나의 단어밖에 말할 여유가 없을 때 하나의 질문이 꼭 던져져야만 한다.
똑같은 말을 돈 끼호떼도 세르반떼스에게 하려고 준비해두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의 고귀한 심장이 부서져 더이상 고동치지 않은 지 사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 인간종족이 낳은 가장 놀라운 존재인 이 두 사람에게 물어볼 단 하나의 말, 하나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햄릿이 물어볼 한마디, 돈 끼호떼가 물을 한마디, 모든 아이들이 자기표현을 시작하자마자 답을 구하는 그 한마디, 사람들 각각이 묻고 또 물어도 질리지 않는 바로 그 물음. 그 어떤 정해진 대답도 없는 바로 그 물음, 셰익스피어와 세르반떼스, 이 두 사람이 그들이 빚어낸 모든 것에서, 그리고 그 해결에 가장 근접했을 모든 것에서 시험적으로, 격렬하게, 기적적으로 추구했던 대답이기도 한 바로 그 물음.
그들이 세상과 작별할 때 귓가에 들리는 그 한마디.
그 한마디.
왜?
번역: 강미숙(인제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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