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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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셀리나 토드 『민중』

더 많은 ‘민중 이야기’가 필요하다
--셀리나 토드 『민중: 영국 노동계급의 사회사』, 클 2016

 

 

iouuoi중국의 소설가 위화(余華)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에서 ‘인민’이라는 단어가 현대 중국에서 겪어온 부침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과거에 ‘인민’은 ‘마오 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대단한 어휘였지만 현재는 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개념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과거 중국을 휩쓸었던 정치적 열정이 부에 대한 열정으로 새롭게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진단한다.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었던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인민’은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을 아우르는 주체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지만 그 열정이 주저앉아버린 현재 ‘인민’은 그 정치적 힘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민중’을 떠올렸다. 둘 다 영어단어 ‘People’의 번역어라는 이유 외에도 이들이 겪어온 ‘어생유전(語生流轉)’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중국에서의 ‘인민’ 개념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민중’ 역시 나름의 찬란했던 개념의 역사를 자랑한다. 70년대 이래 분출한 다양한 ‘민중론’에 힘입어 ‘민중’은 역사의 주인이자 현실의 질곡을 온몸으로 뚫고 나가는 투쟁의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인민’이 그 역동적인 힘을 상실했듯 우리의 ‘민중’도 어느정도는 그렇다. 민중을 외치는 힘찬 목소리는 목하 낡은 정치적 기획으로 지탄받기 일쑤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공식 용어로서 일종의 관제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던 ‘인민’과 여전히 대안적인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우리의 ‘민중’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내 눈앞에 무수히 나타났고 내 귀에 무수히 울렸”던 ‘인민’이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라고 말한 위화와는 달리 한국에서 ‘민중’은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물들였다는 점도 둘 사이의 무시 못할 중요한 차이이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에서 ‘민중’이 중국에서의 ‘인민’이 누렸던 공식적 지위를 갖지 못했다는 역설적인 행운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역설적 행운인 이유는 ‘인민’이 공식화되면서 그 용어에 내재해 있었던 운동성을 상실하고 권력에 의한 주체화의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과는 달리 ‘민중’은 그런 지배권력의 도구가 되는 사태를 피한 채 여전히 대항주체화의 가능성을 담보해내기 위해 분투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발신되는 ‘민중담론의 리부팅’ 논의들이 증거하듯 여전히 ‘민중’은 우리 사회에 담론적, 실천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개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민중론’을 재구축하려는 근래의 대표적 시도로는 강경석의 「리얼리티 재장전」을 꼽을 수 있다.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생동하는 ‘민중’들의 육성

 

쎌리나 토드(Selina Todd)의 『민중: 영국 노동계급의 사회사, 1910-2010』(The People: The rise and fall of the working class, 1910-2010, 한국어판 서영표 옮김) ‘민중’이라는 어휘가 지니고 있는 저항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갱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 선연한 제목만으로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영국 노동계급을 주인공으로 한 장구한 서사적 드라마다. 책은 ‘노동계급’의 탄생에서부터 성장, 절정과 위기의 순간을 100년의 긴 시간을 배경으로 하여 구성해낸다. 그렇지만 이러한 거시적인 시야와는 다르게 책의 대다수 장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영국의 노동계급이 자신들이 영위해가던 일상 속에서 겪어야 했던 분노와 원한은 물론이고 희망과 가능성을 핍진하게 대면할 수 있다.

 

이 책은 ‘민중’에 대해 복잡하고 계급론적인 규정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노동계급’일 수 있었던 영국의 독특한 상황에서 유래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독특한 상황’이란 노동자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상황이므로─스스로를 ‘노동계급’으로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특수한 문화의 존재를 일컫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E. P. 톰슨(Thompson)이나 리처드 호가트(Richard Hoggart)의 작업과 유사한, 전형적인 영국 문화연구의 계보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리처드 호가트의 『교양의 효용』(오월의봄 2016)이 노동계급 출신 남성 지식인의 일인칭적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치관과 일상적 삶의 태도를 그려냈다면 이 책은 여성 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의 풍부한 육성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가령 가내 하인을 다룬 장에서는 실제 하녀로 일했던 많은 여성의 경험담이 등장하며 실업수당을 다룬 장에서는 정부에서 주는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가족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배치되는 식이다. 이는 저자가 수십편의 자서전을 참고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쎌리나 토드의 개인적인 저술이라기보다 영국 노동계급의 자기 역사 쓰기라는 거대한 문예적 실험에 빚지고 있다(동시에 정부와 대학에서 실시한 각종 면담조사에 힘입은 바도 크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우리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평범한 민중, 노동자들의 글쓰기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부러웠던 것은 영국이 마련한 복지제도의 우수성도 아니었고(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국면을 지렛대로 한 것이다), 영국 민중이 나눠 가진 협력과 연대의 정신도 아니었다(그런 것은 우리에게도 드물지 않은 것이다). 내 눈길을 끈 건 각주의 ‘전기 자료’란이었다. 거기에는 노동자가 회고한 자신의 소년 시절 이야기에서부터 성인재교육기관에서 펴낸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중’의 목소리의 출처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민중 이야기’야말로 대안적인 역사를 구축하는 한편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열어나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우리의 ‘무기’이다. 물론 1980년대 민중문학론에서 ‘생활글’이라는 형태로 노동자들의 자기 역사 쓰기가 장려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 ‘무기’를 핍진하게 인식했던 시기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의 ‘문학’은 민중의 ‘목소리’에 얼마만큼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아프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원하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한, 우리는 더 많은 ‘민중 이야기’가 씌어지고 읽힐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마르코스(Marcos)가 외쳤듯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위화가 힘주어 말했듯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가기 때문이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6.10.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