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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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과 (미국)문학 전통: 밥 딜런은 ‘시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답변

이정진

이정진

특이한 공연 광경이다.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청중들까지 미동도 않고 서 있으며, 개중에는 팔짱을 끼거나 눈을 감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그러나 사뭇 정적인 그런 태도야말로 지금 불려지고 있는 노래에 그들이 호응하는 합당한 방식이다. 그 노래에 담긴 압축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순진함과 아이러니를 오가는 노래 속 화자의 복합적인 어조에 반응하자면 비유컨대 독서할 때와 같은 집중력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그 노래를 끝맺는 각성과 결단의 요청에 응답하자면 온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공연은 1963년 7월에 열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펼쳐진 것인데, 무대 위에서는 직전에 발매된 두번째 앨범 <자유분방한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막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밥 딜런과 이미 포크 부흥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존 바에즈가 함께 딜런의 신곡인 「신은 우리 편」(With God On Our Side)을 부르고 있었다.(공연영상)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고발하는 명곡

 

「전쟁의 대가들」(Masters of War)과 더불어 딜런의 가장 뛰어난 반전가요라 할 수 있는 이 노래는 딜런의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성취를 해명하기에 좋은 사례이다. 「신은 우리 편」에서 딜런은 ‘침략전쟁의 연속’이라는 시각을 관통선 삼아 5분 남짓한 노래 한편으로 미국사 전체를 요약한다. “기병대가 돌진해서/인디언들이 쓰려졌고”, “잘나갔던 미국-스페인 전쟁과 남북전쟁은” 연이어 “외워야 할 영웅들의 이름들”을 남긴 채 “금세 밀려났다.” 딴 이유가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결정적으로 특정한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어두운 폭력의 역사를 고발하는 이런 진술들을 하나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나아가 공식적인 미국사가 그 전쟁들에 부여해온 정당성이 거짓임을 폭로한다.

 

이 노래의 화자는 중서부 출신이라는 것을 밝힐 뿐 “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고/내 나이는 그보다도 더 의미없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어투는 바로 미국문학에 숱하게 등장하는, 허클베리 핀을 원형으로 하는 사회 주변부의 미숙한 남성 1인칭 화자(겸 주인공)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소개에 시큰둥한 이 1인칭 화자는 자신의 문학적 선조들과는 달리 여러 전쟁을 직접 겪을 만큼 실로 긴 세월을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들처럼 순진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혹은 순진함을 연기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긴 세월을 살아온 경험의 권위에 더해 급진적인 순진함을 무기로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고안된 논리의 모순을 꿰뚫는 것이다. 노래 초반부에 “신은 우리 편”이라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잘 가르쳐준 역사책”을 칭송할 때 감지되는 아이러니가 이미 그런 결론을 예고한다.

 

화자는 앞서 언급한 전쟁들에 이어 참전의 명분이 분명치 않은 1차대전까지도 “자부심을 갖고 받아들이도록 배우지만”,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적으로 싸웠던, 무엇보다도 “600만명을 오븐에서 튀겼던” 독일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도 신의 편이 되는” 사태까지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적이 우리 편이 되는 경험에 이어서 화자는 우리가 적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평생 미워하라고 배운 러시아”가 미래의 전쟁 상대지만 우리도 그 전쟁을 대비하는 동안 그들처럼 “버튼 한번 누르면” “세계를 한방에 갈라놓을” 무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다음번 전쟁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신의 거처를 정하는 문제는 무의미하게 된다. ‘순진한’ 화자는 이 깨달음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 이 해소할 길 없는 모순을 두고서 고뇌하는 화자는 “지옥같은(끔찍한) 피로를 느끼는데”,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배운 ‘도덕’을 거슬러 ‘검둥이’ 친구 짐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즉 “지옥에 가기로” 결정하기까지의 허클베리 핀의 고뇌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화자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고뇌의 무게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면서 퇴장한다. “나는 캄캄한 시간에 오래/이 문제에 대해 생각했지만”, “내가 당신들 대신 생각해줄 수는 없고/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밥 딜런에게 심어진 예술의 전통

 

위의 간략한 분석은 자국 문학전통의 깊은 이해와 창의적인 활용이 딜런의 예술적 성취에 크게 기여한 요소임을 말해준다. 한국에서는 주로 「바람에 실려」(Blowin’ in the Wind)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 On Heaven’s Door) 같은 소품들이 그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는 탓에 이런 면모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밥 딜런을 여러 문학전통 속에 자리매김하는 학술적 논의가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경우로는 빅토리아조 시문학의 권위자인 크리스토퍼 릭스의 『딜런의 죄악의 비전』 (Dylan’s Vision of Sins)을 꼽을 수 있다. 딜런의 가사를 세밀히 분석하는 이 비평서는 딜런의 노래들이 죄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는 고전적인 시편들을 반향하고 변주하는 양상을 추적한다.

 

사실 딜런이 젖줄을 대고 있는 문학적 전통은 참으로 다채롭다. 2004년에 출간된 딜런의 자서전 『연대기 1권』(Chronicles: Volume One)을 보면, 20대 초반의 딜런이 당시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온갖 예술실험들과 그런 새로운 흐름을 자극했던 유럽의 전위적인 문학사조에 친숙했음을 알 수 있다. 1965년 「구르는 돌멩이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기점으로 포크 미학을 버리고 댄디-힙스터-록커로 ‘변신’했을 때 그는 랭보를 위시한 유럽의 반 부르주아지 방랑자 예술가 계보를 모범 삼아 도발적인 인터뷰나 관중들과 대치하는 기이한 공연행태를 통해 사회적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의 가사들 또한 전 시기의 리얼리즘적인 기조와 결별하고 소외된 예술가적 개인의 자의식을 드러내거나, 현란하고 공세적인 인용을 통해 애매함을 불러일으키는 등 모더니즘 풍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역시 딜런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향은 포크 부흥운동에서 온 것이지 싶다. 물론 이 민중예술 전통은 좁은 의미의 문학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여러 다양한 인종적·민족적 배경의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에서의 치열한 경험을, 활자로 정리할 기회를 얻기 전에 먼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옛 민요에 담아 표현해왔기에, 블루스를 위시한 미국의 민중음악은 미국의 중요한 문화전통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예술 전통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대홍수 같은 재난과 영웅적인 노동쟁의의 기억들이 이런 민중음악에 담겨 전승될 수 있었다. 포크 부흥운동이 이런 전통을 기리는 한편으로 그 전통을 다소간 민속적인 유물로 박제화했던 면이 있다면, 그 전통을 생생하게 현재적인 예술로 되살린 이가 딜런이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만든 딜런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No Direction Home)을 보면 포크로 통칭되는 온갖 민중음악 장르들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던” 가수 지망생 딜런에 대한 피트 씨거 등등의 유명 포크 가수들의 증언이 나온다.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역시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첫 히트곡인 흑인영가 풍의 「바람에 실려」에 대해 일제히 열렬하게 호응했던 당시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칭송이 흥미롭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그 노래는 ‘흑인이 썼어야 했던 곡’이며, ‘기존의 어떤 곡들과도 직접적으로 닮지는 않았지만 가장 흑인영가처럼 들린다’고 평한다. 앞서 분석한 「신은 우리 편」도 기본곡조나 전개방식에서 아일랜드 반란민요(Irish rebel song)인 「애국자 게임」(Patriot Game)에 크게 빚지고 있지만, 딜런은 호전적인 민족주의를 호소하는 원곡을 아이러니한 반전가요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빛나는 시적 순간, 광대한 예술세계로의 통로

 

밥 딜런은 이 짧은 지면으로는 간략한 소개도 버거울 만큼 상당히 규모가 큰 창작자라는 사실이 전달되었기를 기대한다. 여기서는 위의 소략한 분석과 소개에 바탕해 나의 기본적인 입장 정도를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제목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 최선의 방식이지 싶다. 딜런은 글의 서두에서 스케치한 공연 풍경이 보여주는 것처럼 긴 활동기간 동안 거듭해서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인들에게 말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준 창작자이다. 위의 공연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딜런은 워싱턴 행진(1963)에 참가했고, 미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현장 중의 하나인 그곳에서 그는 킹 목사의 그 역사적인 연설에 앞서 자신의 노래 「배가 들어오네」(When the Ship Comes In)로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예술가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그는 경력의 초기에 현대예술에서는 거의 사라진 예언자-시인의 모습을 구현했다.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당시의 딜런을 두고서 ‘블레이크와 휘트먼에게서 물려받은 횃불이 이제 딜런에게로 넘어갔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그의 개인적·예술적 행적은 복잡다단한 굴곡을 그리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고 결코 초기의 위엄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199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대신해 걸프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전쟁의 대가들」을 불렀던 때처럼 딜런은 때때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견제하는 예술의 힘을 환기시키는 순간을 연출했다.

 

물론 이런 성과들은 말을 다루는 솜씨가 없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딜런의 예술에서 초기 포크 미학의 영향으로 가사의 비중이 큰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딜런의 노벨문학상 선정 소식이 있고 나서 역시 비트 세대에 속하는 로런스 펠링게티 같은 시인은 딜런을 처음부터 동료 시인으로 여겼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딜런은 시인인가?’라는 비교적 점잖은 질문이 감추고 있는 공세적인 내용, 즉 ‘딜런의 가사가 종이 위에서도 똑같은 위력을 발휘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딜런의 예술을 기리기 위해서 따옴표 뗀 진짜 시인이라는 호칭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딜런은 보수적인 학계나 대중예술에 편견이 있는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협소한 ‘시인’의 정의에 조금 못 미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정의를 넘어서는 창작자다. 딜런이 ‘시인’이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직업가수로서 뭔가 젠 체하는 느낌이 싫기도 하고, 그 호칭이 자신의 기예를 다 담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이즈음 그는 자신을 ‘recording artist’로 소개하기를 선호한다). 노래 가사는 가락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가락의 제약을 받기도 한다. 내가 볼 때 딜런 예술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의 하나는 「구르는 돌멩이처럼」의 첫 대목처럼 그의 언어가 버팅기는 가락을 길들여서 어우러지는 장면에서 빚어진다. 그 결과 딜런은 좁은 의미의 시적인, 아름다운 가사 대신 서구문학의 온갖 전통과 관련이 있는 인물, 주제, 어구 들이 들어선 광대한 예술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고, 자주 나의 경우처럼 많은 청자들을 그 문학전통으로 건네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정진 / 서울대 강사

2016.1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