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욥의 노래』
세상이 왜 이러냐며 신에게 묻다
--『욥의 노래』, 민음사 2016
복학하고 싱숭생숭할 무렵. 아침마다 도서관에 나가 앉아 읽던 책이 구띠에레즈(G. Gutiérrez) 신부의 『욥에 관하여』였다. 해방신학의 사제가 쓴 욥기의 주석서. 그 책이 이상하게 마음을 쳤다. 한줄 한줄 밑줄을 치며 메모를 하며 읽었다. 주석서에 다시 주석을 달며, 나만의 「욥기」를 만들며 읽었다.
“웬 성서 책이야?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어?” 친구가 물었다. “응,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메시지. 병으로 아프거나 가난에 시달리거나 불의에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그들이 고통을 겪는 까닭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니, 그들 책임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내가 말했다.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아, 그래?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하고 정반대네.”
오해 마시길. 지금 내가 친구의 입을 빌려 기독교를 헐뜯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십자군이야기』 만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간혹 나를 무신론의 전도사로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사실 내 종교는 가톨릭이다. 미사에 안 나간 지 오래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저 대화를 나눈 친구는 현재 교회 집사다.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많이 피울 뿐이다.
아무튼 나는 교회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윤똑똑이들의 편협한 시선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까닭은 게으르고 못났기 때문”이라며, 가난한 사람을 탓하는 시선. “그런 옷을 입고 늦은 시간에 다니니 성폭력을 당하는 것”이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시선. 어리석은 백성이기 때문에 고통을 겪어 마땅할뿐더러 “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는 정신 나간 생각. 자기가 성공했다고 믿는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대형 교회 신자 가운데 이런 분이 많은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들은 남들한테까지 이 관점을 전파하겠다고 나선다. 심지어 고통받는 당사자들을 설득하려 들기까지 한다. “당신이 고통받는 것은 당신이 잘못한 까닭”이라고 말이다.
고통받는 이를 비난하는 세상
「욥기」를 서사시 문학작품으로 보고 새로 번역한 책 『욥의 노래』(김동훈 옮김)가 나왔다. 그 처음 절반이 앞서 우리가 살펴본 내용이다.
욥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재산도 잃고 아이도 죽고 몸도 아프다. 욥의 아내는 욥을 비난하고 떠난다. 고통받는 사람한테 고통의 책임을 물은 셈. 욥을 위로하려고 세 친구가 찾아온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곁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구띠에레즈 신부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위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친구들도 이내 ‘윤똑똑이 병’이 도진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고 재단하려 드는 병이다. ‘욥이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고통을 겪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일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오히려 욥을 설득하려 든다. ‘네 잘못을 인정하라’며 욥을 닦달한다.
아내도 친구도 왜 욥을 탓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왜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고통받는 사람을 먼저 비난할까? 자기 생각을 바꾸기 싫어서 그럴 것이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세상에 널리 퍼진 믿음이다. 이 믿음 때문에 나쁜 짓을 꾹 참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믿음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믿음이 다 무너진다면 지금까지 우리 인생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럴 바에는 욥이 나쁜 놈이 되는 쪽이 편하지 않겠는가? 또는 욥이 겪는 고통이 하찮은 것이어야 한다. 우리 이웃이 이유도 없이 정말로 큰 고통을 겪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일을 교통사고에 비교하고. 군대에서 죽는 청년이 차에 치여 죽는 경우보다 적다고 떠든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는 사회라는 헛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혼을 정상화’하기 위해, 희생자는 다시 한번 희생된다.
그러나 욥은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영웅의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아내와 친구들의 비난에 저항한다. 한 구절 한 구절 우리 가슴을 에는 논쟁이 펼쳐진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신이 몸소 나타난다. ‘「욥기」는 ‘성서’니까, 성서에는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씌어 있겠지’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다면 수천년 동안 살아남기 힘들었으리라. 신은 욥의 편을 들고 친구들을 반박한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신이 나서서 ‘권선징악’의 세계관을 반박하고 있으니까.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신의 답이 충분치 않다면
그러나 끝이 아니다. 욥의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신은 선하다면서, 왜 악이 창궐하게 내버려두는가? 욥은 세상을 고발했다. 신이 좋은 의도로 만든 세상을 고발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 신이 대답할 차례다. 신은 이제부터 판관이 아니라 일종의 ‘피고’가 된다. 『욥의 노래』 번역자가 이 부분을 ‘신의 출두’라고 옮긴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욥기의 뒷부분은 욥의 질문에 대한 신의 대답이다.
그런데 신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떤 사람은 이 부분에서 신이 대답은 않고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석한다. 신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가사의한 현상을 묘사하며 신이 이렇게 대단하다고 과시한다. 시쳇말로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되묻는 것 같다. 누군가는 신이 자기자랑한다고 읽을 것이다. 누군가는 신이 인간을 협박한다고 읽을 수도 있다. 신이 이렇게 잘났는데 덤빌 테냐고 겁을 주는 것도 같으니까. 인간 이성의 눈으로 보면 신이 동문서답하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대답이 충분하다고 여긴다. 신이 직접 나타난 것만도 위로가 된다는 해석도 있다. 부른다고 ‘출두’해준 것만도 신을 믿는 이에게는 그저 고마울 터. 친구들의 비난을 신이 몸소 반박해주었을 뿐더러, 욥을 달래기까지 한다.
나는 옛날에 번역자를 모시고 함께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헬라어 성서를 강독했다. 그 번역자는 독실한 마음으로 신을 믿는다. 말끝마다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친다는 뜻이 아니다. 신이 보기에 참 좋아할, 올곧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한다. 목회는 무료로 하고, 따로 밤새 일을 해 생활비를 번달지. 그렇게 산다면 신이 답하는 부분을 마음속 깊이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수도가 부족해 그런지, 욥과 친구들이 싸우고 신이 친구들을 꾸짖는 장면까지만 마음에 와닿는다. 『욥의 노래』 뒷부분은 나로서는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김태권 / 만화가
2016.11.9 ⓒ 창비주간논평 / 그림 출전: 위키피디아 영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