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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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정인경 『과학을 읽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과학 공부
--정인경 『과학을 읽다』, 여문책 2016

 

 

luili여러해 전, 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모여 있는 외국의 연구소에 몸담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연구소 세미나에 뇌과학자가 연사로 참석해, 당시 한창 각광받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가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밝히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발표했다. 자극적인 주제여서인지 참석자들의 호응이 높았지만 나는 듣는 내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최신의 장비를 이용해 예전에는 관찰하기 어려운 현상들을 관찰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그 관찰의 바탕이 된 가설이나 그를 통해서 얻은 결론은 대단히 진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동양인은 관계에 집중한다”라거나 “서양인은 개인주의적이다”라는 식의 주장들을 뇌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에 대해 새롭게 밝혀주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은 이미 퍼질 대로 퍼져 있는 선입견을 한번 더 다른 방식으로 강화하고 끝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리학에서 얻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인문 또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차례 논파되고 실패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과학의 역사에서 성공적인 발전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당대의 ‘상식’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결국에는 상식을 깨트림으로써 인간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들이 아니었는가.

 

물론 뇌과학은 아직도 한참 형성 중인 분야이고, 어느 분야든 처음에는 간단하게 다룰 수 있는 문제부터 탐구하면서 지식을 쌓아 올리곤 한다. 이런 간단하지만 진부한 질문들을 극복하며 새로이 좀더 세련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뇌과학은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씩 이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날의 경험을 계기로 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고, 좋은 질문은 자기 안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 또는 연구비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질문을 탐구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정말로 연구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연구자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질문은 대개 연구자 스스로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던 것들이다. 옛사람들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爲人之學)와 스스로를 위한 공부(爲己之學)를 구별한 바 있는데, 이는 인격을 수양하기 위한 공부뿐 아니라 모든 배움과 탐구에 적용할 수 있는 구별일 것이다.

 

알고 싶었는데, 어쩌다 피하게 되었을까

 

자연과학도 위기지학으로서 출발했으며, 그 종착점도 결국은 위기지학이 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앞의 질문은 자연과학으로, 뒤의 질문은 인문학으로 각각 발전해나갔지만 그 이전까지 두 질문은 따로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야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향촌의 유자(儒者)들이 대나무로 혼천의를 만들어 소중히 간직했던 것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대나무 혼천의가 실제로 관측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완상(玩賞)함으로써 우주의 생김새를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보는 것은 수양과 경세를 도모하는 선비라면 당연히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그것을 숙달하기 위해 쌓아야 하는 훈련이 매우 길고 복잡한 것이어서, 마치 해자로 겹겹이 둘러싸인 성처럼 다가가기 어렵게 여겨진다. 특히 한국처럼 ‘이과’와 ‘문과’의 불필요한 구분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학령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현대 자연과학의 중요한 논의들을 따라갈 수 있는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중등교육을 마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뉴스를 통해 결과만 접하는 과학은 나와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위기지학이 아니라 어려운 것, 불친절한 것, 메마른 것, 하지만 잘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고 불안한 것, 그래서 더욱 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버렸다.

 

한편 ‘이과’의 길을 걸은 이들도 위기지학에 이르기 어려운 나름의 사정이 있다. 현재의 교육과정으로는 이공학 분야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과학의 출발점인 질문은 배우지 못하고 답만 익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양의 정보를 머릿속에 넣고 각종 실험과 조작에 숙달될 때까지도, 자신이 하는 공부가 나와 세계를 어떻게 이어주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이 또한 적지 않다. 과학을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눈앞의 과제에 골몰한다면 이것도 위인지학으로 귀착하기 십상이다.

 

나와 세계의 연결고리를 다시 찾기

 

이 책 『과학을 읽다: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은 그렇게 파편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근원적인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고 과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물론, 과학의 본령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은 겹겹의 해자에 하나씩 도전할 처지가 아닌 이들도 과학을 위기지학으로서 다시 인식하고 과학이 던진 질문들을 함께 음미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책은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대주제 아래 그와 관련해 지은이가 읽은 책들의 독후감을 실었다. 이 순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먼 옛날부터 인간의 지식이 확장되어온 순서이기도 하며, 오늘날 극도로 구획된 사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는 순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가 지금과 같은 세계에서 살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더 많이 알고 싶지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더 잘 알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우주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질문을 던질 능력을 갖추 게 되었고 어떻게 새로운 지식을 얻는지 모른다. 앎은 모름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이렇게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직시할 때 비로소 새로운 앎의 가능성이 열린다.

 

우리가 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 또는 알면 좋은 이유는 외부 세계에 대해 낱낱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앎으로써 결국은 나에 대해 알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자연과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자연과학의 광대한 체계 안에서 나와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무엇이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새롭게 바라본 나와 세계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나로부터 비롯된 공부라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과학 공부의 효용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과학책을 읽는 것이 늘 쉬운 일일 수는 없다. 이 책이 소개하는 책 중에는 문학과 철학 책도 있고, 대중을 위해 비교적 쉽게 쓴 과학책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뉴턴의 『프린키피아』처럼 여간해서는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의 과학책 시장에서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코스모스』나 『이기적 유전자』 같은 매우 고전적인 책들이 수십년 동안 꾸준히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두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좋은 책이지만, 이 책들이 처음 나온 뒤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천문학이나 생물학 이론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천문학이나 생물학에 대해 이해하려면 다시 최근의 책을 찾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최근의 책은 이들만큼 활발히 팔리는 것 같지 않다. 어째서일까? 혹시 이들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과학책’이어서가 아닐까? 과학을 알아야 할 것 같긴 한데, 여러권 읽자니 엄두가 나지 않고, 한권으로 중요한 것을 대략 파악하고 싶으니 유명한 책으로 시작했는데, 무리하게 집어들었다가 보람도 없이 포기하고 마는 일이 지난 수십년간 여기저기서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부담감을 벗고 가볍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학책을 읽고 과학을 공부하는 것도 위기지학일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책을 읽는 이유가 ‘우주와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이 세계를 더 나은 방식으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기 위해서’라면, 내게 필요한 책을 내게 필요한 방식으로 읽으면 된다. 남들이 유명하다고 떠받드는 책,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책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로부터 비롯된 공부라면 내가 필요한 만큼 하면 되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김태호 /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2016.11.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