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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우리는 함께 시작했다: 고양예고 졸업생연대 ‘탈선’의 성명발표에 부쳐

 

양경언

양경언

SNS 해시태그 운동으로 시작된 성폭력 생존자들의 증언이 끊이질 않는다. ‘예술계 내 성폭력’에 대한 폭로에서부터 ‘친족 간 성폭력’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터져나오는 증언들은, 성폭력이 단순한 인성 문제가 아니라 조직상의 위계와 젠더권력에 의해 벌어지는 구조적인 폭력임을 일러준다. ‘#문단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를 통해서는 나이 어린 습작생들이나 여성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일부 문인들의 행태가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 10월말, 트위터의 ‘고발자5’(@third_rate_kind) 계정에서 자신을 습작생이라고 밝힌 이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참혹함을 잊지 못한다. 이들은 고양예술고등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서 실기강사로 재직했던 시인 B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왔던 성폭력을 여실히 고발하고 있었다. 장장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다수의 학생들에게 일어났던 일이자,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일어났던 일이다.

 

끝내 살아남아 모두를 깨운 외침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고 말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거기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태도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스스로를 책망하며 나날을 보냈던 이들이 있었고, 자신이 겪은 일을 명백한 폭력으로 의식할 때까지 회귀하는 기억 앞에서 무너지고 버티기를 반복하며 오늘까지 생존해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또다른 피해 사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이 사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말을 고르고 고르는 시간을 감당해야 했다. 아무도 몰랐던 일이라고 말할 게 아니라 가해 지목자가 아무도 모르리라 단정하면서 함부로 저질렀던 일이라고, 그가 멋대로 틀어막았던 입들이 끝내 살아남아 모두를 위해 알려낸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발자5’의 폭로가 시작됐을 때, 많은 이들은 일차적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고 분노하면서 피해생존자들의 용기에 지지를 보냈다. 말을 해도 되는지 주위를 살피고 조심스러워하던 피해생존자들에겐 격려가 될 만한 다행스런 반응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나. 이는 가해 지목자를 향해 비난의 언어를 던진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가해 지목자가 가책 없이 개인의 사적인 생활인 양 무마하려 하는 배후에는, 그리고 심지어 피해생존자들의 고발 뒤에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시도하려는 배경에는, 성폭력의 발생을 방조하고 묵인해왔던 사회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일 거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제 시작했다”

 

고양예고 문예창작학과 졸업생 107명이 ‘졸업생 연대 <탈선>’(이하 ‘탈선’)을 조직해 지난 11월 11일 서울약사신협 대회의실에서 <#문단_내_성폭력 고발자 ‘고발자5’에 대한 지지 성명 및 요구안 발표회>를 가졌다. ‘탈선’은 “B 시인의 미성년자 성폭행”과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추행, 몰래카메라 촬영,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금품 갈취”가 가능했던 이유를, 같은 곳에서 강사로 재직했던 ‘C 소설가’의 유사 폭력이 행해졌던 이유를, 사건 발생시 책임을 회피하고 숨어버렸거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개인’ ‘학교’ ‘문학’에서 찾는다.


가해 지목인 B 시인은 “내가 문단에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아느냐. 내 말 하나면 누구 하나 매장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라고 말하며 고발자 및 피해자를 위협했다. 그 ‘문단’은 어디에서 어떻게 실존하는 것인가? (…) 가해 지목인 C 소설가는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하라며, 심리적으로 불안한 학생에게 친밀감을 형성해 성착취로 이용했다. 이때 학생이 건강한 도움을 받고 의지할 만한 공적 자원을 만들어주지 않은 고양예술고등학교는 책임을 회피한 채 이대로 침묵하려 하는가 (…) 가해 지목인은 고발자와 피해자에게 남성우월주의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회 통념과 구조를 이용해 주체적인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을 강요하고, 성적으로 착취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발자와 피해자들의 꿈을 축소하고 발언권을 빼앗을 때,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온 개인들은 여성이 억압되는 동안 어떤 얼굴로 침묵해 왔는가 (…) “시를 쓰려면 사회적 금기를 넘어야 한다”며 가해 지목인 B 시인이 성폭행을 일탈로 은폐시키는 데 공헌한 ‘문학’은 어디에 있는가.


문인들에게 ‘문단’은 실체가 없는 가상공간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등단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상징적인 실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가해 지목자는 실상은 문학 출판계를 아울러 일컫는 ‘문단’이라는 말을, 마치 자신이 문지기로 서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인 것처럼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등단을 꿈꾸는 학생들의 취약점을 악용해, 성적인 착취를 일삼아왔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작가나 독자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문단’이란 말이 지닌 상징권력으로, 명예가 실추될까봐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을 쉬쉬하기에만 급급했던 교육기관의 방치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젠더 관습을 용인하는 다수의 우매로, 무엇보다 개인의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을 미학으로 둔갑시킨 비뚤어진 특정 관점의 문학으로 겹겹이 구성된 것이었다. 이를 낱낱이 드러낸 자리에서 ‘탈선’은, “우리는 이제 시작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구성원들의 이름을 한명씩 차례로 호명했다. 이는 문학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자리란, 지금 여기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구체적인 얼굴이 새겨지는 곳에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또한 성적 굴종을 요구했던 가해 지목자의 관점으로 구성된 ‘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폭력을 무너뜨리는 일에 역할을 하는 문학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다시 세우겠다는,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언어의 힘을 믿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가해 지목자가 제자들에게 ‘성적인 탈선은 곧 문학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일’과 같다고 할 때 꺼내들었던 표현 ‘탈선’을 팀 이름으로 전유한 이들다운 결의가 느껴지는 발표였다. 성명이 발표되는 동안 장내를 가득 채웠던 졸업생, 문인, 편집자, 취재진, 여성단체 관계자 삼백여명 중에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과 삶을 바꿀 문학의 자리

 

‘탈선’은 가해 지목자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인 스포트라이트는 상당한 데 비해, 피해생존자들과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공론장이 없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연대성명 발표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면 그에 대한 고발자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피해생존자의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 역시 허다했다. (당일 ‘질의응답’ 시간을 진행했던 활동가 ‘지혜’씨는 자신도 성폭력 사건의 피해생존자이며, 문제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단체를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탈선’이 마련한 연대성명 발표회는, 피해생존자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용기 내어 발언하는 행위가 마땅히 지지받아야 할 일이며, 공동체의 환부를 지적함으로써 더 나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소중한 행위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자리였다. 폭로된 해당 사례가 제대로 해결되고, 문학 출판계의 성폭력·위계폭력 재발을 막는 데 역할을 한 전례로 남는다면, 앞으로 어디선가 부당한 일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데 망설이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온라인상에서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있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말은, 그것을 듣기 시작한 청자들이 피해생존자들을 단순히 연민의 대상으로 타자화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그간 사람들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넘겼던 상황조차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고, 말의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해당 문제에 어떻게든 연루될 수밖에 없음을 알렸다. 이 고발과 생존의 말들이 출발한 이상, 우리는 더이상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폭력적인 문제 상황이 줄어들어 개인을 둘러싼 생존조건과 발화환경이 안전하게 보장되는 세상을 바란다. 서로가 평등하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삶을 전환하는 힘을 발휘하는 문학도 거기로 가는 길 위에서 이어질 것이다.

 

양경언 / 문학평론가

2016.11.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