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알랭 바디우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무너진 문명을 회복하려는 신화적 폭력의 귀환과 글로벌 위기의 패러다임
--알랭 바디우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자음과모음 2016
2015년 1월과 11월, 두번의 테러가 발발하자 프랑스에서는 IS(이슬람국가)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형화된 몇가지의 레토릭이 양산됐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민주주의 수호’, 그리고 ‘문명의 옹호’. 그러나 동시대에 미국은 이라크와 시리아에, 프랑스는 중앙아프리카 내전에 병력을 투입하며 먼저 해당 시민사회를 파괴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말한다. IS의 프랑스 테러가 문명에 대한 테러로 이해되는 것은 그 테러가 그저 프랑스 중간계급을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난민 유입은 서구 중간계급들의 불안을 부채질했고, 수년째 지속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미국 중하층계급의 공포를 선동하면서 극우 기업형 정치가 도널드 트럼프를 당선시킨다. 트럼프의 당선을 이끈 백인 중하층계급과 프랑스의 이슬람 혐오자들이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이들은 무엇보다 강한 국가를 염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문명을 저들이 갈아먹으려 해. 저들은 문명에 무임승차하려는 야만인들에 불과해.’ 멕시코 이민과 유럽 난민 유입을 저지하려는 이들은 국가 간 장벽 설치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훼손된) 자국만의 세계를 재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난민과 무슬림의 진입을 억제한 후 남는 ‘프랑스적’인 것은 무엇인가, 혹은 거대한 국경장벽을 설치한 후 남는 ‘미국’만의 세계란 무엇인가?
바디우의 흥미로운 질문이 시작되는 부분도 이 지점이다. 테러 이후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외쳐댔던 ‘프랑스적’인 것이란 사실 매우 모호한 것이다. 근현대의 역사에서 프랑스적인 것이란 대체로 대혁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평등, 우애, 자유의 가치와 똘레랑스는 프랑스의 정치문화적 가치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프랑스적’인 것에서 혁명의 가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적인 것은 언제부터 무슬림에 대한 반정립으로 나타났는가.
반테러의 민족적 가치가 만든 기만
테러 이후 프랑스인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을 때, 이 ‘민주주의’의 구호가 너무 과할 정도로 민족(주의)적이라는 점, 따라서 19세기 혁명의 전통과 거의 무관하다는 점을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민주주의 수호’라는 거대한 외침은 현행 지배권력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파시스트 장 마리 르뻰(Jean-Marie Le Pen)의 대중적 부상을 전혀 억제하지 못했고(오히려 중도파 올랑드를 우경화시켰으며), 체제변동의 운동을 수반했다기보다 오히려 체제보수의 경향을 강하게 동반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바디우가 주목하는 주체성의 세가지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서구적 주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서구적 주체성은 기본적으로 중간계급의 주체성이며, 이들은 근대의 시민적 교양을 체화한 탈(脫)야만의 존재들이다. 19세기 이후 형성된 서구 ‘문명’은 혁명적 운동 못지않게 제국주의적 부와 자유의 향유에 기반하는 면이 있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이 향유의 기반들이 무너지자 중간층의 교양계급이 즉각 호출한 것은 이 제국주의적 부와 자유의 가치들이다.
둘째, 서구를 욕망하는 주체성이 존재한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넘어간다. 그들의 이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서구의 풍요와 자유의 판타즘. 20세기의 아메리칸드림을 회고케 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매우 글로벌한 것이라서 서구만이 아니라, ‘서구 문명’을 모방한 한국을 욕망하는 수많은 이민의 물결을 동반하기도 한다. 주지하듯, 이 욕망은 이민자들을 혐오하는 서구적 주체성과 충돌하며 오늘날 인종 간 대결이라는 전지구적 갈등의 패러다임으로 귀결되고 있다.
셋째는 니힐리즘적 죽음충동의 주체성이다. 테러는 기본적으로 죽음충동에 기반한다. 테러의 주된 형식은 바로 자살테러. 일반적인 전쟁의 문법은 자신이 생존하여 타국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테러는 타국의 굴복이 아니라 모든 것의 절멸, 즉 모든 것의 무화(無化)를 추구한다. 테러 후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희생자도 암살자도.”, 이 책 3장 참조). 문제는 여기에서 다시 출발한다. 왜 테러리스트들은 모든 것을 무화하고자 하는가. 테러리스트들이 절망감과 복수심에 함몰되어서인가, 아니면 서구 자유주의의 ‘문명인’들이 수도 없이 외치듯 그냥 그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인가.
모든 것을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실천이 존재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의 중심부 국가들을 주축으로 건설된 국민국가체제는 오늘날 글로벌 경제위기에 의해 그 지반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낡은 것이 끝나고도 새로운 것이 오지 않았기에, 모두가 어떤 구원의 손길을 불안하게 기다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폭력은 더 격렬하고, 대중은 보다 강렬한 리더십을 갈망한다.
마찬가지로 IS 병사들의 욕망을 좀더 범례적인 현상으로 보고 서구인들의 이슬람 혐오와 내밀한 관계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 IS와 서구 백인들의 이슬람 혐오는 모두 자국 시민사회의 붕괴 위기 속에서 탄생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중동-아프리카 통치전략은 과거의 식민지적 주권침탈에서 정부와 일부 폭력조직들에 대한 전략적 활용으로 이동한다(3장 참조). 열강들은 일부 부유한 폭력조직들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고, 정부와 민간조직들 간의 갈등을 내전 양상으로 이끌어 간 후 해당 지역의 석유자원과 부를 약탈했다. (과거 식민주의처럼) 주권체 자체를 직접 관리한 것이 아니라 해당 시민사회의 분열과 파괴를 선동하며 위기를 항구화한 것. 인민에 대한 제도적 보호막이 제거된 후 남는 불안과 격정의 소용돌이는 신자유주의 위기하에 놓인 서구세계와 중동 모두를 감싸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어떤 격정의 감정이며, 그와 동시에 무너진 세계를 복원할 거대한 구원의 서사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기에, 폭력은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만큼 극단적이어야 하며 언제나 영웅적 색채를 띠게 마련이다. IS는 ‘이슬람 국가’ 건설을 그 구원의 서사로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서구의 중간계급은 강력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를 통해 (그리고 난민의 추방과 새로운 장벽의 설치를 통해) 문명의 민족적 가치를 재확립하길 강렬히 염원한다. 이 염원이 트럼프를 비롯한 극우주의 세력에 호응하는 것은 그들이 20세기 세계대전 후 확립된 국민국가에 대한 서구인들의 향수를 만족시킬 폭력적 과격함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이 책은 이처럼, IS의 등장과 그에 대한 서구인들의 반응을 이 시대의 범례적인 증상으로 가져와 해석한다. 그의 또다른 책인 『세기』(한국어판 이학사 2014)가 20세기 초 세계대전과 사회주의혁명의 시대정신을 읽는 저작이었다면, 이 책은 또 하나의 세기가 끝나며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다만 현상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달리, 바디우가 제시하는 실천적 강령(투표 거부)은 정세와 무관한 관념적 구호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바디우는 이 책에서 IS를 이슬람 종교 자체와 분리하기 위해 ‘다에시’(Daesh)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IS가 호명한 이슬람이 실제 이슬람 교리에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신학적 구원의 서사는 국가건설이라는 내전의 요구와 맞물릴 때 비로소 그 극한적(신화적) 폭력의 장을 열어젖힐 것이다. 이 시대는 종교적 구원의 계기를 필요로 하고 있고, 그만큼 보다 근본적이고 보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찾아가고 있다.
고태경 / 정치철학 및 매체학 연구자, 제5회 창비인문평론상 당선자
2016.1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