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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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마당극의 진화: 셰익스피어 원작 『자에는 자로』의 마당극 번안 공연 「법대로 합시다」를 보고

이정진

이정진

근래에 관객들이 이렇게나 즐거워하는 공연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마당극 하면 대번 떠오르는 풍물패 말고도 이 공연(관악극회, 11.2~11.13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은 관객들의 흥을 돋울 만한 장치들을 활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원작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에서는 딱 한 여성인물만이 노래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지만, 이 공연에서는 주요 여성인물 모두가 노래를, 그것도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할 법한 「A Time for Us」 같은 친숙한 대중가요를 부를 기회를 갖는다. 이름부터가 바바리인 한 인물은 실제로 ‘바바리맨’ 복장을 하고 다른 군소인물들과 더불어 원작을 참조하되 한국적으로 번안된 성적인 재담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며, 어느 장면에선가는 이애란의 「백세인생」을 술주정 중에 흥얼거리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에 주눅들지 않은 신명나고 통렬한 마당극

 

소위 악극을 연상시키는 이런 통속적인 장면들은 때때로 안일해 보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에 주눅 들지 않게 하고 관객들 간의 유대감을 조성함으로써 마당극 본연의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극중인물 한명의 주도로 추임새 넣는 법 등 마당극다운 관람방식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며, 무대 아래쪽의 풍물패와 관객석 곳곳에 배치된 ‘잽이’가 그런 반응을 유도한다. 하지만 공연 전반에 흐르는 통속성으로 말미암아 편안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관객참여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공연에서 객석은 무대와 연결되어 시위가 펼쳐지는 광장으로, 수백명의 배심원이 빼곡하게 자리한 재판정으로, 야간점호가 이루어지는 감옥으로 화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무대로의 집중을 어느정도는 강요당하는 일반적인 관극(觀劇)경험과는 달리 서로서로 반응을 확인하며 협력하는 공동체적인 면모를 띠게 된다. (심지어 나는 공연 중에 옆자리에 앉은 관객이 권한 사탕 한알을 받아먹기까지 했다.)

 

이 공연은 흥겹기만 한 것은 아니고, 흔히 문제극으로 분류되는 만큼 상당히 까다롭다고 할 수 있는 원작에 대한 착실한 이해를 담고 있기도 하다. 철저한 한국화를 기조로 하는 상당히 과감한 각색에도 그러하며, 이때도 전형적인 마당극의 양식이나 장치가 그런 이해를 효과적으로 극화하는 데 긴요하게 활용된다. 첫인상과는 달리 그 나름의 방식으로 원작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 공연의 의도는 서구 고전의 각색을 통해 그 작품이 식민주의와 연루관계에 있음을 드러내는 탈식민주의적 다시쓰기가 아닌 것이다. 또한 우선 자국의 평균적인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춘 이 공연은 어느 때부터인가 서구의 극작품들, 특히 고전 희곡을 공연할 때 지배적인 연출경향으로 자리잡은 문화상호주의(inter-culturalism)―간단히 말해 세계 각국의 토착적인 연극형식의 혼융을 도모하는 시도―와도 거리가 멀다. 여기서 길게 논하기는 어려운 복잡한 이슈이지만, 언뜻 진보적으로 들리는 그 이념(구호)은 서구의 지식인 관객들에게 이국적인 연극적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알리바이로 동원될 때가 많다.

 

이 공연의 각색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면 앞서 언급한 철저한 한국화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지금 한국의 현실에 대한 꽤나 적실한 풍자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원작의 복잡한 줄거리를 간추리자면, 비엔나 공국의 통치자 빈센티오 공작이 장기간의 외유를 핑계로 통치권을 평판 좋은 명망가 안젤로에게 위임하면서 전개되는 상황을 다룬다. 안젤로는 공작의 요청에 따라 엄격한 법집행을 통해 국가의 도덕적 기강을 세우고자 하며, 일종의 시범 케이스로 사실혼 관계인 클로디오와 줄리엣 커플을 사문화된 옛 법률에 의거해 혼전관계를 죄목으로 중형에 처한다. 그러나 그는 오빠의 구명활동을 위해 애쓰는 이사벨라에게 청탁의 댓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등 타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며, 결국 수도승으로 위장해 암행하는 빈센티오 공작의 교묘한 술책으로 상황이 정리된다. 이 공연 「법대로 합시다」는 꼬레아 공국을 배경으로 삼고 모든 인물에게 우리말 이름을(예컨대 안젤로는 안절로) 부여하며, 더불어 전반적인 플롯은 유지하되 생략되거나 통합되는 장면과 인물이 있는가 하면 결정적으로 새로운 장면이 추가됨으로써 몇몇 인물의 비중이 커진다. 풍자적 의도를 위해서는 특히 안절로와 연관된 변경사항이 중요하다. 안절로가 통치권을 승계하자마자 비상상태를 선포하는 추가된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유신독재시기를 상기시키며, 안절로가 이전에 검찰총장이었다는 추가 설정은 원작 그대로의 행태, 즉 스스로는 법을 초월해 있으면서 법으로 시민들을 겁박하는 모습과 포개질 때 작금의 한국 지배계급의 위선적이고 교활한 통치전략을 통렬하게 환기시킨다.

 

주제가 주제이다보니 셰익스피어 원작에는 법적인 논점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미묘하면서도 치열한 말싸움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공연은 이런 법정극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 힘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맞춤하게 미리 준비된 듯한 존재가 바로 마당극의 전형적인 인물유형인 광대다. 당연히 원작에는 없는 이 인물은 이 공연에서 실로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중에는 서사극적인 해설자 역할도 포함된다. 광대는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사설 풍의 대사를 통해 극적 상황을 요약하고 안절로의 조치에 대해 논평하며 더 나아가 그 조치를 관객들의 판결에 부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인물은 존재 자체가 극적 환상을 파괴하는 메타시어터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 가장 인상적인 경우를 하나 꼽자면 효과적인 장면전환을 위해 암전 대신 관객들에게 눈을 감자고 제안하는 때이다.

 

이 공연에서 가장 과감한 각색에 해당되는 유길동 캐릭터도 해설자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원작에서 사형수 클로디오(노민오)의 친구이자 인물들 간의 연락책 역할을 하는 데 그치는 루치오에 대응하는 이 인물은 노민오의 동생 노사빈(이사벨라)이 안절로에게 탄원하는 장면이나 안절로의 성접대 요구를 둘러싼 남매 간의 격한 대화장면을 무대 한켠에서 지켜보면서, 인물들이 함축적인 언어로 펼치는 말싸움의 논점을 짚어준다. 이 인물 역시 광대와 더불어 두드러지게 마당극적인 스타일로 연기하는바, 재담과 (헬멧만 쓴 채 오토바이 타는 모습을 재미나게 흉내내는 것 같은) 재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대개의 마당극이 민중을 형상화하는 방식처럼 낙천적이고 정의로운 이 인물은 이 공연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된다. 진즉부터 관객들의 호감을 얻었던 그가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 암행 감찰관으로 활약하며 사태해결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원작의 빈센티오(빈선택)를 대신해 이사벨라(노사빈)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길동의 역할이 늘어난 것은, 교묘한 술책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빈선택의 주인공으로서의 지위를 문제삼는 여러 비평에 부합하는 각색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공연에서 빈선택의 문제적인 면모는 상당히 강하게 암시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술책은 보다 인간적인 보조인물군들의 능동적인 개입으로 인해 성공하게 되며, 고승으로 분장했을 때의 선문답 같은 대사도 대단히 공허하게 들리는데, 이런 맥락에서 차분한 사실주의적 대사처리는 마당극적인 연기 스타일과 대조되어 비인간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공연의 각색과 연출을 모두 맡았던 임진택은 유길동을 주인공으로 지목하며, 빈선택이 모든 영예를 독점하는 결말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에 걸맞은 마당극운동을 기대하며

 

마당극운동은 2차대전 이후 비서구에서 등장한 그 어떤 자생적인 연극운동 못지않게 민족주의적이고 민중지향적인 노선을 분명히 밝혔고, 본격적인 확립기인 80년대 초반부터 서구의 연극형식 일체를 부정하면서 그 대체를 목표로 했다. 조심스러운 관측이지만, 마당극운동은 198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맞은 이래로 87년체제의 성립과 함께 진보적인 예술운동으로서의 동력을 상당히 상실했으며, 이후 긴 쇠퇴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식으로 발전해가지만 좀더 대중적인 노선을 취했던 ‘마당놀이’ 계열 또한 인기가 많이 식은 듯하다. 역시 과문함을 전제하고 일반적인 관측을 내놓자면, 정치적·문화적 풍토가 완전히 달라진 환경을 맞이하여 그간 마당극 진영 내에서 이론적인 모색까지 포함해 서구 연극과의 새로운 관계를 도모하는 시도들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현재까지도 마당극의 이념과 양식을 가장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저서라 할 이영미의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시공사 2001)만 하더라도 80년대적인 운동론의 언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공연이 보여주는바 그 다소간 경직된 이념에서 풀려난 마당극 양식들은 꽤나 탄력적이어서 여러 다른 양식의 공연과도 쉽게 어우러지기에 그 구체적인 쓰임새는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심지어 서양식 극장 환경에서도 상당한 정도로 마당극다운 공연을 펼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러한 모색들을 통해 오늘날의 문화환경에서 진정 대중적인 연극무대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마당극운동을 계승하는 한 방식일 것이다. 

 

이정진 / 서울대 강사

2016.1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