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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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진공의 고요와 뜨거움: 황정은 중편 「웃는 남자」를 읽고

 

정홍수

정홍수

포기할 수 없는 자리

 

홍상수 감독의 신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민정의 대사, “혹시 저 아세요?”는 처음에는 웃음을 나중에는 섬뜩함을 남기는 방식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방황하던 주인공 영수는 결국 민정을 처음 만나는 사이로 수긍하며 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고 한다. 사실, 익숙한 틀이나 패턴으로 타인을 규정한 뒤 그것을 우리의 앎으로 뒤바꾸는 일은 너무 흔하다. 대개는 그러고 살지 싶다. 민정의 저 반문의 자리까지 간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고 그럴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이다. 사회적 인격이라는 가면은 그 회피의 공인된 양식일 테다. 친밀성을 최고도로 추구하는 사랑에서조차 얼마간 아니 상당한 정도로 그러리라고 내가 믿고 있다면, 나 자신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아니, 그래서 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우리에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와 세계를 하나하나 느끼고 만나는 자리를. 이때 무지의 수긍과 ‘당신의 가능한 전체’는 서로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환멸과 혐오의 거리감

 

황정은의 신작 중편 「웃는 남자」(『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를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앞의 홍상수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맥락은 다르다. 세운상가에서 택배 일을 하는 d(작가의 단편 「디디의 우산」(2010)의 그 ‘도도’로 짐작된다)가 화물을 차에 싣고 있을 때 누군가가 “등을 꾹 누른 뒤” 말한다. “나 알지?” d를 초점화자로 해서 진행되던 소설은 이 지점을 경계로 d의 “등을 꾹 누른” ‘여소녀’(황정은 소설에서 ‘이름’은 늘 구별짓기의 상투적 표상을 거스른다)라는 이를 또 한명의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게 되는데, 여소녀는 40여년째 세운상가 5층 점포에서 스피커와 앰프 수리를 해온 예순 후반의 남자다.

 

d는 반지하 방에서 동거하던 연인 dd를 버스의 난폭운전으로 잃고 실의와 분노에 빠져 두문불출하다 직장에서도 해고되고, 주거도 창문 없는 고시원으로 옮긴 상태다. 새로 얻은 세운상가 일자리는 하루 열시간 이상의 중노동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고시원으로 돌아와 짧은 잠을 잔 뒤 편의점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출근해온 생활이 7개월째다. 만나는 사람도 말을 나누는 사람도 거의 없이 늘 혼자다. “나 알지?” 하고 불시에 누군가가 툭 다가왔을 때의 상황이 그러하다. 그의 마음은 지금 악문 어금니와 턱처럼 닫혀 있고, 세상에 대한 환멸은 반대쪽 방향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그는 세상을, 사람들을 혐오하고 있다. 사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게 하고 누군가를 위해 노동하는 일의 신성함에 눈뜨게 해준 dd, 그가 옆에 존재하던 시기가 예외였을 뿐, 사람과 세상에 대해 별 기대 없이 살아온 본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황정은 소설의 뛰어남은 d의 이런 마음의 경로를 그가 살아온 세상의 조건과 공기 속에서 너무도 미세하게 실감하게 해주는 데 있을 테다. 우리는 황정은의 어눌하고 가난한 듯하지만, 그 인물의 시간에 오래 머물다 나온 언어에 기꺼이 설복된다.

 

그렇긴 해도 사정을 과장할 일은 아니겠다. 여소녀의 입장에서는 매일 택배 일로 자신의 수리점을 찾는 이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고, 잘못 배달된 물건을 돌려주려는 것뿐이니까. 게다가 d는 자주 바뀌는 택배 담당자들 가운데에서도 전혀 싹싹한 인물이 아니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d의 반응이다.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d는 그를 몰랐고 그를 알았다.” 모를 수가 없는 것이 d 역시 여소녀의 점포인 564호를 지난 7개월 동안 하루 두번씩 꼬박 드나들었고, 그곳이라면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상가에서 그렇게 아는 사람들은 많았다. 심지어는 지게꾼들의 발과 종아리까지 세세하게 지켜보지 않았나.


d가 그들을 알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d는 헐거워진 모자를 고쳐 쓰며 얼굴을 찌푸렸다. 너를 아느냐고? 이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누군가 등을 두드리며 자신을 아느냐고 물으면, d는 그 얼굴을 몰라볼 것이고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모르니까. 모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알 이유도 없으니까. d가 혐오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같이, 그들도 같을 것이다. 똑같이 혐오스러울 것이다.(239면)


어쩔 수 없이 얼마간 알긴 알지만, 모르고 싶다는 것. 알 이유가 없다는 것. 이 도저히 메울 길 없어 보이는 혐오의 거리감은 황정은이 이 소설에서 d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 보인 가장 심각한 현실의 일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이 소설이 놀라운 실감으로 전달하는 어떤 궁핍과 단절, 절망의 세목보다 우리를 더 깊이 가격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자는 홍상수 영화의 제안에 공감하는 것만큼 d의 마음 안에 세워진 벽에도 공감한다. 그의 마음의 진공은 우리 마음의 일부다.

 

그런데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마음의 벽에 이상한 방식으로 균열이 생긴다. 수리점으로 찾아와 “아느냐고요 내 이름이요……” 하고 따지던 d는 갑자기 낯빛이 바뀌며 당황하고 수그러진다. 여소녀의 수리점에 음향 테스트용으로 놓여 있던 LP판, 죽은 연인이 좋아하고 둘이서 성탄절이면 함께 듣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반을 보았기 때문일까. 여소녀는 자신이 먹으려던 짜장면을 d에게 권하고, d는 묵묵히 짜장면을 먹으며 여소녀가 수리를 마친 턴테이블의 테스트를 위해 올려놓은 음악을 듣는다. 지글거리는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소리’를. 그것은 너무도 잘 아는 노래였지만, 또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잡음은 여기서 음악의 일부였다. d는 한번 더 들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Love me tender」를.”

 

빛과 신호가 흐르는 진공

 

d와 세운상가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는 여소녀는 그렇게 친구가 된다. 황정은 소설은 인간의 바닥을 무심할 정도로 냉정하게 훑어내는 한편으로, 그 바닥을 비껴 생겨나는 미미한 움직임에 예민하게 감응한다. 이 감응에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각도가 있는데, 하찮고 하찮은 것들이 그 뭉개짐과 사라짐, 내동댕이쳐짐을 통해 이루어내는 ‘잔존(殘存)의 형식’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d와 여소녀의 교감이라고 하는 것도 그 ‘하찮음’의 각도 안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만하다. 소설은 두개의 진공 이야기를 공명하게 하면서 끝난다. 하나는 d와 친구 박조배(명동에서 음반, 양말 행상을 한다. 「디디의 우산」의 ‘비비’인 듯하다)가 세월호 1주기 집회가 열리는 세종대로에서 만난, 경찰 차벽으로 둘러싸인 진공. 두 사람은 차벽에 가로막힌 도심의 미로를 두시간 가까이 돌고 또 돈다. 또 하나는 여소녀가 수리하는 앰프의 진공관 안에 담긴 진공. d가 친구에게 돌려주려 했던 책의 제목은 ‘REVOLUTION’이었다. 혁명은 어디에 있는가. 세종대로를 남북으로 나눈 저 차벽의 진공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격벽을 발명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혁명……” 여소녀의 수리점에서 d는 앰프의 진공관을 처음 본다. 전구처럼 생겼지만 전구가 아니란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283~84면)


평생 혁명이라는 말은 한번도 입에도 올리지 않았을 것 같은 여소녀는 진공관 유리 벌브의 뜨거움에 놀라는 d에게 진공관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말한다. 이 두 삽화를 수백만의 촛불로 타오르고 있는 오늘의 세종대로와 잇대어 생각해보는 일은 이상한 설렘과 흥분을 준다. 그러면서 그 생각은 우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기도 한다. 이제 겨우 다시 시작인 것이다. 「디디의 우산」에서 ‘혁명’은 친구들의 우산을 챙겨주는 마음에 깃든다. d의 굳은 턱에도 웃음은 깃들 것인가. 홍상수의 영화에서 영수는 말한다. “이렇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러는 거 참 좋네요.” d에게도 진공관의 뜨거움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처음을 살 권리가 있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6.12.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