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두 광장 사이 비무장지대를 걸으며
오백걸음이 채 안 되었다. 경찰이 세워놓은 차벽 사이의 거리.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걸음을 세며 천천히 걸었다. 너무 아득해서 천걸음은 될 줄 알았다. 다시 시청으로 돌아오며 이번에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었다. 495걸음. 세종로 왕복 10차선 도로를 막고 생긴 텅 빈 공간은 비현실적으로 적막했고 잠시 평화롭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한 젊은 엄마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자 경찰이 막아섰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DMZ가 생겼다.
‘촛불’과 ‘태극기’의 거리, 나와 아버지의 거리
이 ‘비무장지대’ 양 옆에, ‘우리가 민심’임을 주장하는 ‘시민’과 ‘국민’이 있었다.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분리시키는 것이 경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이 텅 빈 공간이 우리 사회의 단절과 갈등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라가 두쪽이 났구나. 걱정스럽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마음에는 진짜 ‘우려’만 있었을까? 사실 더 깊은 속마음에서 나는 ‘안도’했던 것 같다. 나는 태극기와 성조기 물결을 관찰자의 눈으로 구경한 후, 잠시 후 오백걸음을 옮겨 촛불과 노란리본이 있는 내 편으로 가면 그만이다. 거기에서 생각과 취향이 맞는 내 친구들과 만나면, 나는 이들을 잊어버릴 거다. 주름 잡힌 그 얼굴들을 볼 일도 없고, 스피커에서 들리는 그 화난 목소리와 거친 언어를 들을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 경찰은 고맙게도 불편해하는 내가 이들을 다시 만나지 않도록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막무가내’인 이들과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안도되지만, 만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한 마음. 그건 그들에게서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부모님과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있는 집이 주변에 적지 않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태극기집회에 나오는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의 ‘스펙트럼’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는 것 같으니, 괜히 집안에서 정치 이야기를 해서 서로 마음이 불편해질 일을 만들지 않는 거다. 나도 아버지를 만날 때, 세월호 노란리본을 가방에서 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되고, 옷에 달아둔 블랙리스트 브로치를 안 보이게 가리게 된다. 그게 단서가 되어, 그분의 신념과 내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그분의 심기를 건드릴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내가 그분에게 선대의 지혜를 별로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상일이 내게 중요하면 할수록, 나는 그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 날씨 이야기, 공부 잘하는 손녀 이야기, 바쁜 나의 일정을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침묵을 메꾼다. 일생을 열심히 노력하여 ‘고생과 시련 끝에 우뚝 선’ 아버지가 기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나는 안다. 나는 나의 안전한 심리적 공간을 지키려고 분투하느라 에너지를 엄청 쓴다. 그래서 남게 되는 고독과 피로. 그건 내가 선택한 거다.
광장 이후의 시간, 마주 보기
다시 천천히 광화문으로 돌아오는데, 곳곳에 놓인 통신사들의 이동기지국이 보였다. 통신3사의 이동기지국은 1,2차 촛불집회 때 광장 시민들 간의 통신폭증으로 난리를 겪은 후 3차 집회부터 곳곳에 설치되었다고 들었다. 두 광장 사이, 비무장지대에도 이동기지국이 있었다. 통신사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통화품질을 위해 설치된 긴급 서비스 장비입니다.” 통화품질. 더 빠르게, 더 많이, 끊기지 않게 보낼 수 있는 문자와 목소리. 그걸 지원하는 이동통신기술. 그런데 그 많은 통화 중 이 광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얼마나 될까?
설 명절 때 아버지와 며칠을 지내는데, 그분 전화로 끊임없이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그러곤 대통령을 구하자는 구국의 목사님과 집사님의 동영상 연설이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는데 마음속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온 카톡 중 내가 보낸 것은 몇개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별로 없다.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 혼자 계신 아버지에게는 끊임없이 울리는 이 카톡이 그분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문 같은 건 아닐까. 그 문은 내 것이 닫힌 만큼 더 크게 열리는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아침마다 문안 카톡을 보낸다. ‘굿모닝’으로 시작해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로 끝내는 두세마디. 아버지가 보내는 짧은 대답은 여든 넘은 노인이 어젯밤 무탈하게 주무셨다는 신호이고, 나는 그분이 그 대답을 보내고 안심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지금 그만큼만 한다. 지금은 그저 이런 방식으로 정치가 오랜 시간 어이없게 갈라놓은 가족을 일상의 관계에서 조금씩 봉합하는 거라고 위안하며.
하늘에서 보면 두개의 광장에 모여 있는 두 무리의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대치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등을 대고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무대가 그렇게 설치되어 있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우린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 대고 소리치는 것이다. 손석희는 ‘앵커브리핑’(JTBC 뉴스룸, 2017.2.13)에서 이 두 집회를 다루면서,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Amos Oz)의 말을 들려줬다. “이것은 희생자와 희생자 사이의 싸움… 전망 좋은 자리에서 이 비극을 부추기며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탄핵인용이 가까워지면서 부추기는 자들의 손에 의해 광장 한편은 더 거칠어졌다. 나는 광장의 시간이 끝난 후가 더 걱정이다. 이 갈가리 찢어진 시간을 꿰매며 ‘같이’ 살아야 하는데, 방향을 돌려 이제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해야 할 텐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화내지 않고 소통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늘 갈등을 피하고 내 마음이 편안한 공간에 안주해온 나는.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았다. 우리 모두에게.
이향규 /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17.3.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