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촛불을 들고 일상으로
우리는 함께 해냈다. 추운 겨울을 넘는 일이 간단치 않았지만,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10월 29일 첫번째 촛불을 들었을 때, 우리는 오늘이 올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도전’ ‘불가능한 꿈’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촛불의 주장이 이루어질지 걱정하던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회의하던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믿지 못했던 존재들에게 분명한 답을 보여주었다.
촛불혁명이 이루어낸 것들
촛불은 거대한 물결이었다. 국민의 단호한 의지, 일관된 외침, 압도적인 힘은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국회가 작동하고,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제 길을 걷도록 했다. 정치인들, 지식인들이 아니라, 국민들의 수고가 항쟁을 밀어붙인 것이다. 이제 광장을 기억하는 시민들, 혁명을 공유하는 세대가 형성되었으며, ‘국민주권’의 신념은 나라 곳곳에 새겨지게 됐다. 쉽게 되돌리기 힘들 것이다.
촛불은 성숙한 민주시민들의 집합이었다. 집회의 규모, 의제의 설정, 등장인물, 필요예산 등을 결정하고 완성한 것은 시민이었다. ‘염병하네’를 외친 청소노동자, 세월호를 이야기한 엄마들, 18세 참정권을 일깨워준 학생들, 아이들까지 동반한 가족들이 주인공이었다. 최고의 전략과 문화를 만들어낸 집단지성은 바로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분노했지만 절제했고, 배려와 평화를 실천했다. 고통스러운 투쟁을 행복하고 즐거운 축제로 만들어냈다.
촛불은 묵은 모순들을 폭로하고 사회의 과제를 제시했다. 뻔뻔한 국정농단세력들, 권력에 빌붙은 재벌들, 블랙리스트로 통제되는 사회에 대해서까지 냄새나는 적폐들을 온전히 드러냈다. 그리고 눈여겨볼 것은 이들 거악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개혁과제들까지 부각시킨 것이다. 무대 발언 매뉴얼까지 만들게 한 페미니스트와 장애인 단체들의 노력은 외면해왔던 사회의 아픔을 햇빛 아래로 가져왔다.
촛불의 승리는 대한민국을 결정적인 변화의 길로 이끌 것이다. 시민들은 선례가 없는 시민무혈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놀라운 인내와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촛불은 지적, 도덕적 측면에서 반대편을 크게 능가했으며, 역전이 불가능한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수많은 혁명의 뒤를 따르는 혼란과 반동의 싹조차도 잘라버렸으며, 정권교체는 물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이 가능토록 해놓았다.
멈출 수 없는 일상에서의 혁명
하지만 지금 촛불의 승리가 완벽한 승리, 최후의 승리는 아니다. 1997년 IMF 때의 금모으기가 나라는 살렸지만 우리의 삶을 살려내지 못했고, 2008년 촛불이 광우병 소고기 수입은 막았지만 국민의 자유를 지키지 못했던 것처럼, 여기서 멈추면 우리의 삶과 이웃의 삶은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의 승리에 다다를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촛불은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했다. 이루어야 할 혁명은 복합적이고 도처에 널려 있으며, 대통령 하나 바꿔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켰다. 지진대 위에 있는 핵발전소의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정부정책과도 싸워야 하지만, 재벌들의 부패, 지역민의 이기주의, 국민의 안전불감증과도 싸워야 한다. 또한 강남역의 살인은 화장실 구조를 변경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세월호를 3년 동안 잊지 않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눈물겨운 행진이 혁명의 도화선이 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린 파견노동자의 불행을 기록하고, 여성혐오에 맞서 연대하는 것이 혁명의 동력이 됐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촛불은 이들 문제를 ‘적폐’라는 이름으로 정의했고. 어느 하나라도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걸 깨우쳤다.
이제 우리가 촛불을 들어야 할 곳은 일상이고 현장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촛불은 언제든지 광장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다. 촛불혁명의 2막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식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취지를 위해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도 약간의 과정을 거친 후에 해체할 예정이다. 촛불의 유산은 모두가 공유하되, 촛불혁명을 광장에만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마이크만 있는 광장이 아니라, 한없이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일상을 혁명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결단이다. 이제 세계 역사에 없었던 길을 가야 한다. 혁명의 지도부도 없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선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촛불의 의미와 과제들
지난 3월 11일, 20차 촛불에서 퇴진행동은 <2017촛불권리선언>을 발표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남긴 것처럼, 2017 촛불혁명의 의지와 과제를 담기 위해 1500여명 시민과 장충체육관에서 토론회를 개최(2.18.)한 데 이어, 토론회에 참여한 각 테이블 대표들이 2주에 걸쳐 성안한 것이다. 선언은 촛불혁명 2막을 밝힐 등불이며 깃발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 촛불시민은 부당한 권력을 탄핵시키는 것이 끝이 아니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긴 여정의 시작임을 안다. 이 선언은 촛불 들고 광장에서 함께 외치고, 토론하며 나누었던 희망과 꿈을 엮어낸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만든 이 선언은,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노예 같은 삶을 강요하며,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정치,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사법체계를 더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이다. 이제 우리 촛불시민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추위 속에서도 광장을 지켜왔던 그 뜻으로 삶의 현장과 일터를 바꿀 것이며, 아래로부터 민주주의의 역량을 성장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갈 것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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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선언된, 개혁을 위한 10대 과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촛불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의정치를 개혁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주권자행동이다. 촛불은 특권세력을 위해 남용된 공권력을 용납하지 않는 주권자의 직접행동이다. 촛불은 부패와 특권을 만드는 일체의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항의이다. 촛불은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언론을 통제한 권력과, 이에 협력한 언론에 대한 심판이다. 촛불은 재벌이 누려온 특권과 부당한 부의 대물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민 행동선언이다. 촛불은 노동자의 권리를 회복하고 불행한 노동을 없애고자 하는 시민들의 절규이다. 촛불은 생존권을 보장받으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선언이다. 촛불은 불평등한 교육, 서열화·획일화된 훈육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촛불은 평화롭게 공존할 권리와, 외교·국방·통일 정책을 민주적으로 결정할 권리의 외침이다. 촛불은 모든 생명이 자신의 터전에서 조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행진이다.
염형철 /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상임위원
2017.3.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