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노란 리본의 약속
2017년 4월 16일. 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 분향소에서 세월호 3주기 기억식이 열렸다. 아직도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않은 9명의 실종자 때문에 세월호 3주기 추모식이 아닌 기억식이 되었다. 박근혜를 탄핵하자 3년 만에 세월호가 만신창이가 되어 뭍으로 올라왔고, 세월호 분향소 앞에는 말끔한 슈트 차림의 정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통령 후보 넷이 기억식 무대 위로 올랐다. 그들 중 둘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재가동과 선체조사위원회 구성,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을 약속했고, 한 사람만은 거기에 더해 책임자를 법정에 세워 처벌 받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대에 선 네 사람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국회에 있었거나 정당의 대표로 한국정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와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는 데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세월호를 뭍으로 끌어올린 것은 3년을 길에서 싸운 유가족과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해 광장으로 나섰던 이들, 노란 리본의 약속을 잊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민들을, 형제자매들을, 어머니와 아버지를 광장으로 이끌고 촛불을 들게 한 것은 별이 된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들이었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 줄은 미처 몰랐다.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친 정부의 수장이 자그마치 1000일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킬 줄은 몰랐다. 심지어는 그 1000일 동안 자신의 사익을 위해 국정을 농단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긴 세월호참사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네번의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나는 질풍노도 위에 선 공부방의 열여섯 청춘 셋과 함께 제주해군기지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강정마을에 있었다. 오전 11시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서 열리는 거리미사를 하러 가던 중 한 아이가 말했다. “이모,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이 탄 세월호란 배가 침몰했대요. 아, 아니다. 이모, 전원구조래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미사에 참여했다. 미사가 열리는 한시간 동안 세 아이는 경찰에 들려 길가로 밀려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미사가 끝나고 세 아이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이모, 경찰이 지켜줘야 하는 건 힘없는 시민들이어야 하잖아요. 왜 우리를 막죠? 화가 나요.” 오후에 우리는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부과된 벌금 마련을 위한 수익사업을 도우려 중산간으로 올라가 고사리를 꺾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마을에 돌아왔더니 세월호 승객 전원구조라는 기사가 오보라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다 울먹이며 말했다. “이모, 이게 말이 돼요?” 그런데 그 말이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정부는 애도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유가족의 슬픔을 지우기 시작했고, 평범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이기심을 부추겨 유가족과 시민을 갈랐다. 협박과 회유로 유가족과 유가족을 가르고 짓밟았다. 사건과 사고, 그로 인한 억울한 죽음도 멈추지 않았다.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 때는 비가 왔다. 차벽이 유가족과 시민을 갈랐다. 유가족은 불법시위대가 되어 차벽 안에 갇혔다. 세월호참사가 재연되는 듯했던 그 참담한 밤에 고등학생이 되어 추모집회에 참석한 세 아이가 울부짖었다. “이모, 저 차벽을 어떻게 넘어야 하죠? 이게 말이 돼요?” 2주기 때도 세월호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던 낮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끝내 폭우와 강풍이 몰아쳤다. 유가족들은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광화문광장을 지켰고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 속에 있었다.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세 아이도 비를 맞으며 광화문광장에 섰다. 그리고 201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세 아이는 토요일마다 광화문으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2017년, 어느새 별이 된 형 누나들보다 한살을 더 먹어 고3이 된 세 아이의 팔목에는 여전히 노란 팔찌가, 가방에는 노란 리본이 묶여 있다. 그들은 어른들은 만들지 못한 생명이 존중받는 새로운 세상을 자신들이 만들겠다는 약속을 그렇게 되새기고 있다.
2017년 4월 16일. 세월호 3주기인 오늘 우리는 노란 옷을 입고 안산의 골목을 다시 걸었다. 벚꽃 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선부동 골목과 거리를, 별이 된 친구들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걸었을 그 길을, 누군가는 설레는 첫사랑을 나누었을 화랑유원지의 산책길을 걸으며 별이 된 열여덟 청춘들과 아직도 가족 곁에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를 떠올렸다.
진실과 기억을 위해
3주기 기억식에서 경기도지사는 대립을 지양하고 화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통합, 화합을 부르짖는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통합과 화합을 믿지 않는다. 그동안 진실을 밝히지 못한 죽음과 사건이 너무나 많았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부역자들을 제대로 법정에 세우지 못한 데서 시작된다. 또한 한국전쟁을 전후로 이루어진 양민학살, 유신정권과 전두환정권 아래서 벌어졌던 의문사 사건들, 5.18광주민중항쟁,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참사, 수십년 동안 계속된 군의문사…… 그 어느 것도 책임을 끝까지 묻지 않았고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화합과 통합의 다른 말은 묵인과 방조였다. 그 결과가 세월호였다. 이번에는 결코 통합이나 화합을 운운하며 세월호의 진실을 덮게 내버려둘 수 없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뿐 아니라 그 전 정권의 비리까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그 뒤에야 통합과 화합이 가능하다.
세월호 3주기를 앞두고 정부가 약속한 416안전공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민들 일부가 416안전공원을 도시 외곽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집값이 떨어진다느니, 안산이 세월호 때문에 낙후된 도시가 된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또다시 시민과 유가족을 가른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가면 원폭에 파괴된 원폭 돔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 시 한가운데 흉물스러운 돔을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면서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416안전공원을 세우려고 하는 화랑유원지는 단원고 희생자들이 어려서부터 가족과 산책을 하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며 놀던 곳이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기억관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416안전공원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외곽이 아니라 시민들 속에 있어야 한다. 별이 된 아이들과 그 또래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놀이터에 가듯, 친구 집에 놀러가듯 가서 세월호를 기억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416안전공원을 아이들이 뛰어놀던 화랑유원지에 만드는 일은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김중미 / 작가, 기찻길옆작은학교 활동가
2017.4.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