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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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젊은 시의 산문화에 대하여

박형준 | 시인



최근 우리 시단의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는 산문화(散文化) 경향이다. 한 젊은 시인의 고백은 흥미롭다. “시가 스스로를 갱신하는 한 방편(사실은 가장 크고 효과적인 방편)으로 저는 산문을 꼽고 싶습니다. 시가 시에만 매달릴 때 딱딱한 석고상 이상의 자세를 못 보여주는 한계를 시 바깥에서 꽝꽝 깨고 들어오는 것이 산문인 것 같습니다.”(김언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자>)


최근 들어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젊은 시문학에서는 ‘상징의 해체’가 대세를 이룬다. 이들은 상징이 근원 혹은 기원과의 합일을 꿈꾸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일치한다는 ‘향수’에 기반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신들의 시는 이것을 말하고 저것을 뜻하기에 차이의 수사학이라고 명명한다. 유추와 동질이라는 상징과 달리, 이것을 말했는데 시간이 흘러 저것을 뜻하기에, 언어가 실체를 지칭하지 못하는 어긋남의 수사학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시는 바야흐로 ‘산문의 시대’이다. 역사에 의해 호명되는 ‘명령을 요구하는 밤’>(김수영) 따위로서의 산문은 잊혀진 지 오래이고, 지금은 시가 산문 그 자체를 사는(生) 시대이다. 따라서 이들 젊은 시인들에게는 ‘기원의 해체’가 또다른 명령이며, 여기에는 권위적인 ‘하나의 화자-상징’을 해체하고 ‘복수의 화자-알레고리’를 내세우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 수립된다. 그러나 낡은 시라고 여겨지는 그 기원들에 과연 낡은 것들만이 있는 것일까.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즉 ‘시가 시에만 매달리는’) 운문 형식으로 된 다음의 시는 ‘딱딱한 석고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소릉조> 전문


  ‘70년 추석에’라는 부제의 이 시는 30년대에 (음악성을 살리는 방편으로) 유행했던 2행 띄기 등이 계승된 전형적인 시이다. 1연에서 5연까지에는 하나의 화자가 나타난다. 견해에 따라서 6연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연의 돈호법은 이 시를 아주 다른 각도에서 읽게 만든다. 과연 6연까지의 시적 화자가 7연에 나타난 화자인가? 전체 시를 유기적으로 통어한다는 신비평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돈호법은 앞의 것을 묘사하는 진부한 장식적 수사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수사학적 질문으로만 읽는다면 앞의 ‘나’와, 생략되어 있지만 뒤의 ‘나’ 사이에는 정확히 구별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내포된다. 어쩌면 마지막 연에는 좀더 위대한 주제와 진술의 복잡성을 이끌어내는 화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화자가 전체를 통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어되는 시적 화자를 바라보는 또다른 주체의 등장이 이 시에 있다.

최근에 나온 고형렬 시집 《밤 미시령》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달려라, 호랑아>도 역시 다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블레이크의 <호랑이>에 견줄 만한 시적 드라마가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다. 

 

달려가는 호랑의 껍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두 앞발 사이 깊숙한 가슴 근육
덜겅거리는 심장, 출렁이는 간, 긴장하는 목뼈
헉헉대는, 터질 듯한 강한 폐 근육
얼룩거리는 붉은 어깨와 엉치등뼈, 거기 붙은 살점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커다란 구슬 같다
마구 흔들리는 골은 산산조각 깨어질 듯
무거운 육신을 잔혹하게 흔들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모자이크된 육체가 뛰어가는 정신
주먹같이 생긴 허연 뼈들, 링 같은 꽃의 구근
기둥 같은, 널빤지 같은 뼈들이 가득한 육체
먹이를 뒤쫓아 맹추격하는 호랑의 구조
그놈들 가끔 보며 세상을 가르친다 지오그래픽의
제작자를 탓하지 않지만 생식기를
혹주머니처럼 흔들며 뛰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부끄러운 표정의 질주를 비웃는다 이것이 ‘세계’를 보는
나의 유일한 창구, 한없이 저놈은 비위사납다
이해하면서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하며
달려라 조금만 더, 뛰어라 호랑아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라 

 

묘사부만 읽으면 쉼표로(즉 호흡으로, 음악적 요소로) 호랑이의 동물성을, 특히 움직임을 급박하게 밀어올리고 있는 호랑이가 포착된다. 반면 진술부는 사유로, 그래서 느린, 생각하는 화자가 등장한 다. 여기서 과연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묘사하는 화자, 그리고 진술부의 어떤 발언을 하는 화자는 일인인가? 또 맨 마지막 연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라”의 ‘너’는 이제까지 묘사하는 시적 화자, 진술하는 시적 화자와 동일인인가? 아니면 호랑이인가? 이 시는 이렇듯 하나의 화자로 규정되지 않는, 그래서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다성적인 울림을 던져준다. 고형렬의 이번 시집이 뛰어난 점은 이런 육화된 모호성, 망각되는 주체들에 대한 새로운 비유에서 찾아도 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기원을 흐려버리는’, 그래서 ‘미래’로 탈주하는 최근 시보다는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 기원에서 뭔가를 찾는, 거기서 재해석하고 거기서 재설정하는, 그러나 망각될 수밖에 없는 기원의 흔적을 현재(현대)의 자신에게 투사하는 시편들에 매력을 느낀다. 하나의 화자이든 둘 이상의 화자이든, 산문을 지향하든 음악을 지향하든 시는 시일 뿐이다. 어느 중견시인이 통렬하게 젊은 시인들의 시를 비판했듯이, 필자 역시 ‘시가 아닌데, 기표로 포장된 시라고 하는 산문의 지리한 또다른 교술’적 시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것이 재래적 시이든 새로운 세대의 시이든 말이다. 물론 ‘미래파’로 규정되는 현재의 젊은 시들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시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싯점에서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는 담론에 고개가 갸웃해진다는 말이다.(시인은 원래 자기 시를 말하지 않는 법인데, 왜들 그렇게 자기 시를 미리부터 말하고 싶어하는 걸까. ‘도달’을 설정하면, 그것도 자기 시의 비밀로 평생 간직해야 할 ‘노름돈’을 내가 “얼마 있소” 하고 말해버리는 꼴이 아닐까.)



시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를 지향한다. 기원을 회복하기 위해 절규하는 이 모호하고 다성적인 목소리야말로 언제나 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고, 알고 싶다는 것이 필자가 시를 대하는 자세이다.

2006.05.09 ⓒ 박형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