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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환상과 콘래드의 다짐

백낙청 | 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는 폴란드 태생으로 선원과 선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영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낭만적인 생애에다가 그에게 제2외국어(프랑스어 다음으로)인 영어로 글을 써서 영국소설의 대가가 되었다는 이색적인 후광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론 그의 문학 자체이며, 이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가 있었지만 20세기 유럽소설의 또다른 거장(巨匠)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다음과 같은 만년의 고백이 특히 흥미롭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라고 말할 때면 나는 얼굴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넌센스지요! 나에게는 가당치 않은 호칭이며, 조셉 콘래드야말로—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사실인데—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입니다. 나는 《노스트로모》(Nostromo)나 저 멋진 《로드 짐》(Lord Jim)을 절대로 못 썼을 것입니다. 물론 그도 《마(魔)의 산》이나 《파우스투스 박사》를 쓰지는 못했겠지만, 양쪽을 비교해볼 때 콘래드에게 훨씬 유리한 계산이 나옵니다."(1951년 8월 28일 The New York Herald Tribune지의 문학란 편집자 Irita Van Doren에게 보낸 편지)

 

이런 콘래드가 전통적인 사실주의에 안주하지 않았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노스트로모]와 [로드 짐]을 포함한 그의 많은 소설들은 처음 읽는 독자가 어리둥절할 정도의 대담한 서사기법상의 실험을 수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국한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또는 환상적 요소의 도입에 대해서만은 명백한 거부의사를 밝힌 이 또한 콘래드다.

 

후기작에 속하는 중편(또는 경장편) <그림자 선(線)>(The Shadow-Line, 1916)에는 태국 연안을 항해하던 배가 바람이 없어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오도 가도 못하여 선장으로서의 첫 항해에 오른 젊은 주인공에게 잊지 못할 시련을 안긴다. 일등항해사는 실제로 배가 마법에 걸렸다고 믿고 그렇게 주장한다. 게다가 일부 독자와 비평가들마저 콘래드가 이 작품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도입했다고 해석했는데, 1920년판 '저자의 말'(Author's Note)에서 그는 이 점을 단호하게 부인한 것이다.

 

콘래드는 자신의 상상력은 "살아 있고 고통받는 인간들의 세계의 범위를 너머로"(beyond the confines of the world of the living, suffering humanity) 진출할 만큼 신축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자기가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면 형편없이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러나 곧바로 한결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의 모든 도덕적·지적 존재를 관통하는 불굴의 소신은, 우리네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들은 무엇이건 다 자연에 속하며 아무리 예외적이라 해도 우리가 그 자의식을 가진 일부를 이루는 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계의 다른 모든 효과들과 본질에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진기하고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들 진기하고 신비로운 것들이 우리의 감정과 지성에 작용하는 방식들 또한 정녕 불가사의해서, 인생을 마술에 홀린 상태로 파악하더라도 크게 탓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 단순히 초자연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기에는 진기함에 대한 나의 의식이 너무나 확고하다. 초자연적인 것이란 (누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결국은 제조된 품목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은 자 및 산 자와 우리의 관계가 지닌 내밀한 섬세함에 대해 무감각한 정신들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다정한 기억들에 대한 모독이요, 우리의 존엄을 해치는 일인 것이다."

 

콘래드의 이런 다짐이 소설 속에 초자연적 또는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는 일체의 시도를 비난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콘래드가 존경한 선배작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만 해도 사실주의에 뿌리를 두었으되 초자연적 요소를 끌어들인 훌륭한 소설도 여러 개 썼다. 19세기 최고의 소설가를 꼽을 때 으레 거론되는 발자끄나 디킨즈의 작품에도 초자연적 현상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콘래드를 인용하는 나의 의도 또한 작금의 팬터지 문학을 통째로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님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더구나 오늘의 한국문학에서도 황석영의 《손님》에서부터 박민규의 《핑퐁》에 이르기까지 환상이나 초자연적 사건을 활용하여 도리어 콘래드가 말하는 "살아 있고 고통받는 인간들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주는 훌륭한 소설들이 씌어지고 있는 터이다. 다만 팬터지 문학을 하건 다른 무엇을 하건 현실세계 자체의 진기함과 신비로움에 대한 콘래드의 도저한 존중심을 공유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2006.05.23 ⓒ 백낙청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