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미국문화 속의 동성애 이야기
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교수
게이 카우보이들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리안(李安)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은 아카데미상을 여럿 받은 화제작이지만 국내 영화팬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게이들의 사랑이라는 소재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문제가 된 듯하다. 말하자면 <왕의 남자>처럼 동성애적 요소를 적절하게 버무려놓는 대중적 방식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게이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를 내놓고 옹호하는 '급진적 자유주의' 방식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차라리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종 드 히미꼬>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퀴어무비'(동성애영화) 장르의 정치적 코드에서 보면 그다지 혁신적이거나 '불온'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동성애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과 강렬한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미국문화의 여러 틈새들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번째 틈새는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동시에 가장 마초적인 미국문화의 양면성에서 발생한다. 만약 영화의 무대가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쌘프란씨스코나 뉴욕이라면 이 이야기의 긴장과 매력은 사라질 것이다. 두 주인공 에니스와 잭이 서부지역 가운데서도 '깡촌'에 해당하는 와이오밍주의 촌놈들이기 때문에 내면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사랑에 빠져든다는 설정 자체가 문제가 된다. 마초적 심성을 지닌 두 남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싹튼다는 것은 요샛말로 '대략 난감'한 일이다.
두번째 틈새는 미국 서부의 현실과 이상(신화) 사이에서 벌어진다. 전통적인 서부극에서 카우보이들의 끈끈한 우정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때려잡으면서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거친 삶과 투쟁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1963년의 에니스와 잭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뜨내기 일꾼에 불과하고 그들이 찾은 일거리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양떼를 돌보는 일이다. 서부의 신화에 비해 너무 초라한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이 둘은 진정한 카우보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퀴어) 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미국 서부의 이상과 신화는 완전히 추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에니스와 잭의 내면 깊숙이에, 그리고 거칠고 황량한 자연의 한 자락에 똬리를 틀고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비록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마초적이면서 순수한 카우보이의 심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동명의 원작소설에서는 애니 프루(Annie Proulx)의 섬세하되 터프하고 과묵한 문체가 서부의 정경과 서부 사나이 특유의 황량하고 비정한 질감을 적절하게 포착한다. 리안 감독의 영상 역시 서정적이긴 하지만 이런 황량한 질감을 보여주는 데 어느정도 성공한다.
이 영화에 서사적 긴장을 불어넣는 최종적인 틈새는 두 인물의 표층의식과 심층의식 사이의 어긋난 지점들이다. 가령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엉겁결에(?) 정사를 벌인 다음날 에니스와 잭은 둘다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그들의 심층에서는 이 치명적인 사랑이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양치기 일이 끝나자 에니스는 헤어짐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잭을 떠나보내고 약혼자 앨머와 결혼한다. 잭은 잭대로 텍사스의 부잣집 딸 루린과 결혼하여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복귀를 꾀한다.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국면은 4년 뒤에 잭이 에니스의 집으로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남편 에니스와 잭이 정신없이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의 앨머의 어두워지는 표정은 동성애자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예고한다. 물론 당사자의 고통은 더 혹독하고 길다. 에니스와 잭은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삶의 표면을 영위하면서 일년에 한두 차례 만나 몰래 사랑을 나누는 구차한 이중생활을 무려 20년 동안 지속한다. 표층과 심층의 괴리가 이제는 표리부동한 이중생활로 지속되는 것이다. 그들은 왜 좀더 자유주의적인 지역으로 도망가서 함께 살지 않을까?
에니스는 농장을 꾸리면서 둘이 함께 살자는 잭의 거듭된 제의를 한사코 거부한다. 어릴 적 이웃의 동성애자가 린치당해 죽어 있는 현장을 목격한 이후 그의 뇌리에 각인된 동성애 공포/혐오가 아직 작동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에니스는 나중에 잭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린치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내면적 공포가 잭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주된 이유는 오히려 노동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지키고 딸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에니스 나름의 신조 때문이다. 에니스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듣고 텍사스에서 와이오밍까지 득달같이 달려온 잭을 매정하게 돌려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또한 예정했던 만남을 돌연 취소하여 잭과 격한 언쟁을 유발하는 이유도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다. 에니스의 이런 일상적 고투야말로 "너를 단념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잭의 애절한 목소리 못지않게 영화의 긴장미를 팽팽하게 당기는 힘이다.
에니스는 잭이 죽은 뒤에야 이런 일상적 고투에서 놓여나 잭의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노동자 에니스가 일자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 맏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 노릇을 다하려는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긴 세월 닫아걸었던 가슴속 깊은 곳의 자기감정에 대한 인정이며, 잭의 애절한 사랑에 대한 뒤늦은 응답처럼 보인다. 20년 넘게 잭이 간직해온,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자기들이 입었던 피 묻은 셔츠를 쳐다보면서 "맹세할게"라고 나직하게 읊조리는 마지막 장면은 에니스에게 노동과 동성애 사이의 갈등이 일정한 화해에 도달했음을 일러준다. 한때 카우보이의 영혼을 찢어놓은 동성애는 이제 하층노동자의 일상적 삶 속에서 작은 자리를 허락받은 것이다.
2006.06.13 ⓒ 한기욱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