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어떻게 팬심이 변하니?

심판의 호각 소리가 울린다. 웅성거리는 소음을 비집고 비정하게 울려퍼지는 후반전 종료 소리에 따라 선수들은 동작을 멈춘다. 고개를 숙이는 선수, 드러누워 하늘을 보는 선수, 동료의 처진 어깨를 감싸는 선수.

 

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전 경기들에서 무기력하게 2패를 했기 때문에 동승하고자 했던 16강 엘리베이터는 이미 만원이었다. 지지는 않았지만 16강행은 좌절되었으므로 그들은 느리게 걸었다. 그 곁으로 한 무리의 선수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도 이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전 경기들에서 그들은 빠르고 대담하게 그라운드를 지배하며 16강에 안착했다. 그들 나라에서 쓰이는 화폐 중에는 나무늘보가 도안되어 있지만 선수들은 비범했다. 코스타리카 선수들이다.

 

어느 팬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광경

 

이들의 비범함에 눌려 졸전 끝에 귀국하게 된 나라는? 잉글랜드다. 골키퍼 조 하트를 비롯하여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대니얼 스터리지, 대니 웰벡, 라힘 스털링, 웨인 루니 같은 선수들이 즐비하다. 수년 동안 국내 축구팬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보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아스널, 첼시 등에서 주력으로 뛰는 선수들이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피를로에게 멱살을 잡혔고 우루과이의 수아레즈에게 농락당했다. 자국의 월드컵 역사상 56년 만에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 채 조별리그 탈락을 한 것이다.

 

그런데, 종료 직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주저앉았던 선수들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서로 격려하며 관중석으로 다가갔다. 후반 27분 교체 투입된 스티븐 제라드는 두 손을 높이 들어 팬들을 향해 박수를 했다. 그의 곁으로 선수들이 나란히 서서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꽉 다문 입술로 눈물을 삼키는 선수도 있었다. 잉글랜드 팬들의 환호와 격려는 더 열렬해졌다. “영원한 캡틴, 제라드”라고 쓰인 보드를 흔드는 관중도 보였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젊은 선수들을 선발로 내세웠던 로이 호지슨 감독은 선수들과 악수를 하고 호르헤 핀투 코스타리카 감독과도 덕담을 나눴다. 그 한순간만 본다면 호지슨 감독이 마치 16강에 올라간 감독처럼 보였다. 그의 거의 모든 전술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지막 경기, 마지막 순간에 스티븐 제라드를 출장시켜 그가 생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를 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금요일 아침에 우리가 할 일이다.

 

이전 경기들을 복기해보면,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러시아와 대등하게 맞싸우면서 팀 밸런스를 끌어올렸지만 알제리전에서 대패했다. 알제리 감독이 공격 진영에서 무려 5명이나 교체하며 한국전을 대비한 것에 비해 홍명보 감독은 몇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했던 패턴을 무덤덤하게 반복했다. 모두가 목격한 대로 박주영은 단 한번의 슈팅도 못했고 이청용은 경기 초반부터 둔탁하게 드리블을 했으며 기성용은 곧잘 흥분했다. 중원에서 이미 허물어졌기 때문에 중앙수비수 홍정호와 김영권, 그리고 골키퍼 정성룡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 경기, 벨기에전. ‘기적’ ‘5%의 희망’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런 말들이 넘쳐난다. 일종의 정신승리다. 그러나 이마저도 없다면 이 며칠 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이미 16강에 안착한 벨기에가 2진 선수로 나설 가능성이 높고 러시아 팬들이 경기 중에 극우파 상징 도안을 뒤흔든 것이 문제가 되어 그들의 승점이 박탈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이 모든 얘기는 흉흉한 소문일 뿐이다.

 

90년대의 일을 생각한다. 1994 미국 월드컵, 독일전에서 골을 넣은 황선홍 선수는 세러모니를 하지 않았다. 볼리비아전에서 수많은 기회를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냈기 때문이다. 그 대회 이후로도 황선홍 선수는 여의치 못했다. 급기야 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는 걷지도 못할 만큼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경기도의 어느 연수원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황선홍이 출전한 평가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황선홍이 얼마나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인지, 그가 펼쳐내는 공간 상상력이 어떤 수준인지 강변했다. 그러나 졸전이었다. 수십명이 황선홍을 비난했다. 동시에 나를 힐난했다. 나는 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연수원 바깥으로 나가서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언젠가 반드시 황새는 훨훨 날아오르리라. 그 간절한 비원이 2002 한일 월드컵,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터졌다. 예리한 감각과 비범한 공간 상상력으로 골을 터트린 것이다.

 

그들의 결정과 땀에 박수를 보내자

 

나는 지금 황선홍이라는 이름 위에 박주영이라는 이름을 겹쳐 부르는 중이다. 두 차례의 경기에서 박주영은 113분을 뛰었으나 알제리전에서 단 한번의 슈팅도 하지 못하는 졸전을 보였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 위협적으로 전진하거나 단독 질주한 횟수도 2번뿐이다. 러시아전에서는 태클이나 걷어내기 같은 수비를 단 한번도 못했다. 패스 성공횟수도 13회에 불과한데 이는 골키퍼 정성룡과 같다. 급기야 홍명보 감독의 ‘으리(의리) 축구’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으리 축구론’에 반대한다. 예전에 허정무 감독이 차두리를 선발하자 차범근 감독과의 경쟁관계를 해소하려고 뽑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최강희 감독이 이동국을 지속적으로 기용했을 때는 소속팀 전북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번에는 ‘으리 축구’라고 비판한다. 감독 자신의 명예와 팀의 사활이 걸렸는데, 그들이 그 무슨 의리나 관계 회복, 소속팀 배려 때문에 특정 선수를 뽑겠는가. 본 프레레를 제외한 모든 전임자들이 박주영을 선발해 최전방에 세웠다. 그는 2005년 8월에 경질됐는데, 그때 박주영은 스무살이었다. 그 이후 10년 가까이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허정무,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 등이 박주영을 바로 지금 그 자리에 세웠다. ‘으리’로 볼 수 없는 10년 세월이다.

 

홍명보 감독이 박주영을 출전시킬지, 그것도 선발로 내세울지 궁금하다.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벨기에 를 어떻게든 대파한 후 다른 경기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박주영이 필요하다면 뛰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앉아 있게 할 것이다. 대단히 힘들고 고독한 결단인데, 그런 무거운 결정을 하라고 그에게 감독이라는 권한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박주영 대신 이근호나 김신욱이 선발 투입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그의 힘겨운 결정이므로 우리는 박수로 그들을 성원해야 한다.

 

누군가에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박빠’ 아니냐고. 글쎄, 부정하지 않지만 박빠라서 이렇게 쓰는 게 아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이동국 팬이며 김신욱 팬이며 이근호 팬이라면, 똑같은 마음으로 박주영을 성원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결점 많고 실수투성이인 동물, 곧 인간이다.

 

스페인이 대패하며 쓰러졌고 잉글랜드가 56년 만에 단 1승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그들의 팬들은 ‘당신들과 함께 한 몇년 동안이 행복했다’며 격려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라. 알제리전이 열리기 직전인 6월 23일 새벽 3시 59분까지만 해도 우리는 홍명보와 더불어 행복했고 박주영의 짜릿한 골들에 만취했고 이청용의 현묘한 기예에 흥분했으며 정성룡의 선방에 전율하지 않았던가. 그 90분 때문에 오랫동안 나눴던 사랑과 추억을 다 버릴 것인가.

 

우리 모두를 위한 벨기에전으로

 

잉글랜드 아스널 팬의 자전적 연대기를 기록한 소설가 닉 혼비의 『피버 피치』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축구를 보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며, 실제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남의 행운을 축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운을 자축하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몇몇 선수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식의 단말마적 비명이 아니다. 선수들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고 그들의 슬픔이 곧 우리의 슬픔이다. 열렬한 팬심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승리에 환호성을 터트리는 데는 익숙하지만 패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많이 겪지 못했다. 패자, 약자, 쓰러진 자에 대해 진심으로 애통해하며 격려하고 감내하기 어려운 슬픔을 나눠 갖는 연습을 좀처럼 하지 못했다. 그래도 스포츠의 역사에서는 더러 그런 아름다운 일이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거의 해보지 못한 일이다. 교실에서, 거리에서, 회사에서 지치고 힘들고 급기야 쓰러진 자에 대해 우리는 보듬어주는 연습을 제대로 해본 일이 없다. 이제 그 아름다운 예행연습을 해보자. 벨기에전이라면, 셰익스피어도 구상하기 어려울 만큼 썩 훌륭한 무대 아닌가.

 

정윤수 / 문화평론가

2014.6.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