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메이데이 2012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낸씨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35명의 페미니스트 학자와 활동가, 문인의 글을 모은 책이다. 엮은이 낸씨 홈스트롬(Nancy Holmstrom)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1970년대 융성했던 페미니즘 역사의 한 조류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기획으로 볼 것을 제안하며 이 개념을 확장해서 사용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수많은 불평등의 배열들―젠더, 인종/민족, 계급, 성정체성 등―이 교차하면서 위계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주목하고 그 가운데 계급문제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하면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자본주의 분석과 젠더 분석을 결합한 다양한 논의를 소개한다.
페미니즘의 첨단을 엿볼 수 있는 책
이 책은 맑스주의에 대한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현대적 재해석의 이론적 프레임을 보여주는 논의들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현지 문화기술지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사례연구, 유색인 여성의 관점에서 본 재생산권리와 가정폭력에 대한 재해석, ‘복지 여왕(welfare queen; 정부의 복지혜택을 받으며 캐딜락을 몰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며 복지 퍼주기를 비꼬는 표현)’ 논쟁, 미국의 재군사화와 글로벌 질서의 재편, 환경문제와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다시 묻기 등 최근 페미니즘의 주요 이슈와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한꺼번에 모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젠더가 어떻게 인종과 계급을 교차하며 작동하는지를 분석할 뿐 아니라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차이의 정치학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난제들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정체성의 정치학 이후 미국 페미니즘이 직면한 도전과 현재적인 쟁점을 살펴보는 데도 매우 유익하다. 하지만 페미니즘 입문서로서는 조금 어려운 감이 있다. 그리고 미국사회의 맥락에서 나온 다양한 의제에 대한 분석과 논평이 많아서 그런 정치적 맥락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다시 논의되는 계급문제
이 책이 제기하는 가장 급진적인 문제의식은 계급과 인종/민족, 성정체성을 아우르면서 젠더가 작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이론과 비판을 광의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기획으로 묶어내려는 시도이다. 그동안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맑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등 로즈매리 통(Rosemary Tong)이 고안한 분류체계에 따라 이해되었고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적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혹은 문화 페미니즘, 그리고 인종적 정체성과 성정체성 등의 차이에 기반한 흑인 페미니즘과 제3세계 페미니즘, 레즈비언 정치학과 퀴어 이론 등이 주요한 항목으로 추가되어왔다. 이러저러한 주의(ism)들과 연결된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 각각을 중심적인 억압의 기제로 설명하지만 계급과 젠더, 인종/민족, 성정체성의 역동적인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하였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의 억압을 계급 억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하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중층적인 이중체계로 작동한다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물론 단일한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체계로 파악하기를 선호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중체계론 이후 포괄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기획은 정체되었고 총체화 서사(totalizing narrative)와 역사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영향하에서 문화와 일상, 언어와 상징,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문화 페미니즘이 유행하였고 여성의 심리와 욕망의 문제가 주목되었다. 그리고 탈식민주의와 성정치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서구백인중심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 속에서 여성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소수자의 문제가 주목되었고 정체성의 정치학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영향에 대한 페미니즘 내부의 재평가와 함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맥락에서 경제민주주의와 계급문제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는 현실에서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기에 딱 맞는 때’라고 주장하는 홈스트롬의 문제제기는 한국사회 페미니즘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데에도 숙고할 가치가 있다.
사유와 실천을 쇄신하는 장으로
홈스트롬은 ‘계급과 성뿐 아니라 인종/민족이나 성적 지향 같은 정체성의 다른 측면까지 통합해 일관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종속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광의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과 젠더, 인종/민족, 성정체성의 역동적인 상호연관성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사회주의 페미니즘 유산의 연속으로 재구성하려는 기획이다. 환원주의적인 계급결정론을 넘어서 계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종적, 성적 정체성과 차이를 아우르면서 젠더와 계급, 인종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정치적 과정을 함께 파악하려는 시도는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연구자와 활동가가 지향하는 바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기획으로 페미니즘의 이론과 정치학의 쇄신을 동시에 이루려면 좁은 의미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사회주의가 우리에게 어떠한 정치적 기획으로 재사유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을 소비에트권이나 서유럽 사회복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사회주의와 등치하지 않는 비전으로서의 사회주의로 다시 사유할 수 있는 담론과 실천이 필요하다. 또한 젠더와 인종/민족, 섹슈얼리티의 쟁점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이 함께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적 전개에 대 한 재평가를 비롯하여 페미니즘 내부에서 다양한 논쟁과 논의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공저자의 글을 하나의 책으로 담은 편역서임에도 매끄럽고 유려한 번역을 해준 옮긴이의 노고에 감사하며 더 명확한 논의를 위해 한가지 용어 번역상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intersectionality’는 보통 ‘교차성’으로 번역된다. 인종과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등이 다양하게 교차하면서 작동하는 권력의 상호작용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개념인데, 옮긴이가 조애너 브레너(Johanna Brenner)의 글에서 이를 ‘횡단성’으로 번역한 것은 혼란을 줄 우려가 있다. 횡단성은 대체로 존재하는 이질성을 뛰어넘어 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천이나 이질적인 영역을 가로지르는 유동성을 지칭하는 ‘transversality’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승화 /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2014.9.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