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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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신해철의 죽음 앞에서

최유준

최유준

고(故) 신해철의 음악적 삶은 1990년대라는 독특한 시대를 배경으로 대중들과 접속되기 시작했다. 그가 대학밴드 ‘무한궤도’ 활동을 정리한 뒤 솔로가수로 데뷔하여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와 같은 발라드곡을 히트시키면서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 부럽지 않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해가 상징적이게도 1990년이었다.

 

하지만 대학 87학번인 그는 짧은 재학기간 동안이나마 거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문화를 경험했던 ‘386세대’의 일원이기도 하다. 발라드 가수와 록밴드 리더, 주류와 비주류, 현실주의와 낭만주의, 자유분방함과 ‘꼰대스러움’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한 신해철의 모순적 정체성은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1990년대를 둘러싼 한국 대중문화의 모순을 체현하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신해철과 1990년대

 

신해철의 음악적 행보와 관련해서는 1990년대가 디지털 음향기술의 획기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이 시기에 개인 컴퓨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디지털 음향기술은 작곡과 편곡, 그리고 청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80년대말까지도 인기 있었던 록밴드들이 일제히 주류 음악시장에서 물러나게 된 것도, 통기타 반주로 노래하던 아마추어 음악 문화가 일순간에 자동 반주에 맞추어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는 노래방 문화로 바뀐 것도 당시에 급격하게 확산된 디지털 음향기술 때문이었다.

 

신해철은 솔로 1집 때문에 생긴 발라드 가수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던지기 위한 수단으로 이 디지털 음향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컴퓨터 미디음악을 독학으로 마스터한 그는 1991년에 발표한 솔로 2집(‘마이셀프’) 음반을 사실상 원맨밴드 홈레코딩 방식으로 완성해낸 것이다. <재즈 카페>가 담긴 이 음반이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자신감이 생긴 그는 2년이 지난 뒤 또 한번의 놀라운 자기변신을 시도했다. ‘넥스트’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록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류 음악계에서는 이미 록밴드의 사망선고가 내려진 상황에서 벌인 모험이었다. 이후 신해철은 보란 듯이 넥스트의 음반들을 음악성과 상업성 양면에서 성공시켜냄으로써 시대의 요구와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나 불일치를 해소하고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현실적 역량을 과시했다.

 

신해철과 넥스트에 열광한 1990년대의 대중은 <도시인>(1993) <날아라 병아리>(1994)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1995) 등의 노래에서 보이는 성찰적인 가사와 프로그레시브한 음악에 공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지점에서 신해철에 대한 열광의 이유를 찾는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타협점을 찾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가는 그의 전략가적 태도에 있었을 것이다. 전례 없는 경제적 풍요와 자본주의적 욕망에 대한 긍정의 요구가 (임박한 파국의 조짐 속에서) 이루어지던 시기, 모든 것이 쉽게 변하고 불안정하던 1990년대에 신해철은 내면의 고민과 유연한 소통능력을 아울러 갖춘 이상적 리더의 상을 대중에게 제시해주었던 것이다.

 

“아! beautiful life!”

 

1980년대식의 사회적 고민과 1990년대식의 개인적 고통 사이에서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대중적 공감과 위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신해철스러움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해철스러움이 한국 대중과 행복하게 접속할 수 있었던 시한은 1990년대까지였다. 해체했던 넥스트를 재결성하기도 하고 솔로음반을 포함한 몇장의 음반을 냈지만, 천하의 신해철이라도 냅스터와 소리바다 파동을 거친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음원 시대의 정글숲에서 ‘후크송’으로 무장한 케이팝 정예 부대들에 맞서 나갈 여력은 없었던 것 같다.

 

2000년대 이후 신해철이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잉여스러운’ 새벽 라디오방송으로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점, 대통령후보 노무현에 대한 지지선언을 기점으로 수시로 정치적 발언과 의견 제시를 함으로써 ‘논객’ 내지는 ‘중2병 환자’라는 핀잔까지 듣기도 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노래나 음악이 아닌 대화로 이루어졌을 뿐 모두 다 지극히 신해철스러운 퍼포먼스들이었지만 이 시대의 주류적 감성과 공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잃어버린’ 십여년이 흐른 뒤에, 누군가 1990년대를 향해 ‘응답하라’고 주문했던가. 그 주문에 힘입어 윤상, 서태지, 그리고 유희열의 ‘토이’까지 1990년대의 뮤지션들이 다시 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해철 또한 7년 만의 솔로앨범 ‘리부트 마이셀프’를 지난 6월에 발표하고 다시 기지개를 켰다. 1991년의 솔로 2집 ‘마이셀프’를 의식한 이 음반에서 뮤직비디오와 함께 발표한 타이틀곡 <A.D.D.a>는 신해철 본인의 목소리만으로 무려 1000개 이상의 트랙을 녹음하고 조합하여 완성시킨 1인 아카펠라곡이었다.

 

<A.D.D.a> 뮤직비디오 

 

사운드를 다듬는 꼼꼼한 장인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23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차도남’의 고독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 대신에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녹음실에서 밤샘 작업하는 그의 고단한 일상을 숨김없이 내비친다는 점이다. 그것이 유명인의 일상을 들추어내는 이 시대의 만연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남긴 잔영일지도 모르지만, “호떡 같은 세상”, “쉰떡 같은 세상”과 같은 욕지거리 하나하나에서도 아스라한 삶의 호흡이 느껴질 수 있게 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는 코러스의 마지막에 “아! beautiful life!”라는 진담인지 자조인지 모를 감탄사 한마디를 남겨두었다. “즐겁지 않으면 지는 것”이라 했던 어느 인터뷰에서의 그의 말이 생각 나 이 감탄사를 진담으로, 그리고 그의 유언으로 새기기로 했다.

 

 

최유준/ 음악평론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HK교수

2014.1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