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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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무너져선 안될 인권이란 가치

 

제이

제이

서울시가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만든다고 했다. 시민이 직접 만드는 인권헌장이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고, 6월부터 시민위원을 모집했다. 천명이 넘는 응모자 중 연령과 성별을 고려하여 추첨된 시민 150명, 전문가 30명으로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가 구성됐다.

 

시민위원회는 4개월 동안 수차례 회의를 통해 숙고와 토론을 거쳐 인권헌장의 내용을 만들었다. 의견이 갈리는 부분에 대한 의결방식을 논의 끝에 표결로 하기로 결정했고, 11월 28일 표결을 통해 구체적 차별사유들을 삭제하지 않은 원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11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시민위원회가 만장일치 합의 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인권헌장을 선포할 수 없다고 밝혔다.

 

무산된 인권헌장 선포, 익숙한 전개

 

인권도시를 표방하며 시민참여를 강조해온 서울시가 수많은 시민이 오랜 시간을 들여 함께 채택한 인권헌장을 거부한 것은 일견 의아한 일이다. 서울시의 갑작스럽고 무리한 후퇴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인권헌장 제정안 공청회에 300여명이 조직적으로 난입해 ‘성소수자는 없어져야 한다’ ‘성소수자 차별금지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서울시의 인권헌장 제정을 막기 위해 공개적으로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현장에서 시민위원들과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심각한 물리적·언어적 폭력에 피해를 입었으나 서울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공청회는 무산되었다. 시민인권위원회의 최종 의결 회의가 열리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익숙한 전개다. 2007년 법무부가 4년여에 걸친 법안검토와 의견수렴 과정을 토대로 만들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안은 입법예고되자마자 20여개 차별금지 사유 중 성적지향, 학력, 출신국가 등 몇몇 사유에 대한 차별은 ‘금지되어선 안된다’는 일부 집단의 의사표명에 부딪혀 한달 만에 7가지 차별금지 조항이 삭제된 채로 심의되었고 결국 통과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정부 부처와 국회에서 몇차례 차별금지법 제정이 추진되었으나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을 허용하라는 반발이 거세지면 번번이 철회되었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나 성북구 주민인권헌장 등 구체적 차별금지 사유를 명시한 규정은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힘겹게 제정되었고, 지금도 폐기 또는 개정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최근 서울시의 외국인 주민 지원 정책에 대한 반대 민원이 제기되는 현실 역시 보편적 인권 보장 조치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다.

 

서울시는 인권헌장 제정으로 ‘사회적 갈등’이 커질 것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 주장과, 타인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으며 차별을 허용하라는 주장을 ‘사회적 갈등’이란 말과 나란히 두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어떠한 정책이나 사회적 사업도 만장일치의 합의로 진행될 수 없으며, 수많은 의견을 수렴하는 가운데 최소한의 원칙을 벼리고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인권이란 가치가 사회적 갈등의 문제로 저울질되어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이 공공연한 현실

 

우리는 누군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식민지 국민이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말살 당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사회적으로 아동의 인권과 여성의 인권이라는 가치가 주장되어온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도 각 사회에서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싸움이 진행 중이다. 여전히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특정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편견, 취약함과 차이에 대한 혐오, 동일성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누구나 차별받아선 안된다’라는 아름다운 대원칙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지만, 구체적으로 ‘A, B, C라는 존재를 차별해선 안된다’는 사실에 대한 합의는 매우 어렵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기대어 ‘너도 A의 편이냐’ ‘너도 사실은 A인 것 아니냐’는 공격이 힘을 발휘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인권이 있다는 추상적인 합의를 넘어서 구체적인 차별금지의 사유를 명시한 ‘헌장’까지 만들어 ‘선포’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약속을 정치적 논의와 결정 속에서 굳건히 다져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미 헌법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제10조)라고 명시되어 있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보편적 차별금지 사유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지역공동체에서 인권헌장을 새롭게 마련해가는 것의 의의이다. 인권헌장이 사회적 갈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도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인권헌장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서울시 사태는 인권헌장이 제정되어야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권헌장 선포가 무산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서 차별금지를 위한 사회적 논의는 ‘누군가는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이 의견으로 수용됨으로써 오히려 공공연하게 특정 차별에 대한 용인을 표명하는 결과를 초래해왔다. 지금 서울시는 마찬가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 역시 차별을 용인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늘은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이다. 지금 시청에는 누군가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용인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기에 먼저 나서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도 비슷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차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당신에게 말을 건다. 당신은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 

 

 

제이 /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2014.12.1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