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인문학협동조합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
연애를 못하는게 인문학 탓이라고?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인문학협동조합 기획, 알마 2014)
연말이라 그런 걸까? 평소 같으면 서평은 고사하고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을 덥석 집어들었다. 물론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이 기획한 책이고, 글쓴이들 중 몇몇은 몇번 본적이 있는 후배라 책을 증정 받았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런 개인적인 이유 말고도 기획 자체가 흥미로웠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도 힘들어졌다는 요즘 젊은 세대가 연애를 인문학과 연루시켜 책을 썼다니 말이다. 난생처음으로 ‘연애’란 단어가 들어가는 책을 읽기 시작한 경위다.
연애와 인문학, 궁금증을 부르는 기획
우선 눈에 띈 것은 제목이다. 우선 ‘연애를 못한다’ 할 때 ‘못하는(unable)’ 걸까 ‘못하는(poor)’ 걸까? 또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인문학’ 탓이란 걸까? 우선 첫번째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답은 비교적 명료하다. 한편에서 연애를 ‘못하는(unable)’ 것은 요즘 젊은 세대가 내던져진 사회경제적 처지 때문이다. 이 답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먹고살기 힘들어 연애, 결혼, 출산 등 세가지를 포기한 이른바 ‘삼포세대’란 말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연애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다. 다른 한편 연애를 ‘못하는(poor)’ 것은 매우 사변적이고 비평적인 논제가 된다. 이 책만 해도 타자와 욕망에서 섹스를 거쳐 대지와 바다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연애를 ‘잘할까(good)’? 이건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고금 연애에 빠진 이들의 운명적 물음이다. 전지전능한 제우스도, 지상의 권력을 한손에 쥔 제국의 황제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비루한 시정잡배도, 그 누구도 연애를 ‘잘했던’ 적은 없다. 누구나 그/녀의 몸과 마음 앞에서 환희와 쾌락을 느끼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강렬하게 좌절과 배신과 분노를 느꼈을 터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저자들은 장고(‘아무리 생각해도’) 끝에 ‘인문학’에 다다른 걸까?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더불어 사는 이들의 ‘행복’을 이리 묻고 저리 묻고 하는 학문이라 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연애를 ‘못하는(unable and poor)’ 존재들로 전락시킨 이 사회가 과연 살 만한가 묻고 있는 것일까? 거꾸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연애를 ‘잘하면(able and good)’ 풍요로운 사회라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눈에 띄는 제목이 조금은 아쉽다. 일본 만화 제목(‘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을 패러디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인문학을 해서 연애를 못한다는 뜻이든 인문학을 몰라서 연애를 못한다는 뜻이든, 이중의 ‘못한다’의 이유를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연애의 근원적 어려움에서 찾고 있는 저자들의 글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애써 연애와 인문학이란 주제를 찾아 기획했다면 조금 더 깊은 고민이 아쉬운 대목이다.
각설하고. 다섯 꼭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저자들은 저마다의 관점에서 연애에 관한 ‘썰’을 푼다. 물론 나름의 장점이 돋보이는 글임에는 틀림없다. 최근 연애 담론의 트렌드를 차분히 추적하는가 하면, 수려한 문체로 연애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시적 언어로 풀어내기도 한다. 또 소수자와 오따꾸로부터 이 시대의 연애를 성찰하기도 하고, 대지와 바다라는 세계지각의 근원적 경계영역에서 로컬한 사랑론이 펼쳐지기도 하며, ‘붉은 연애’라는 표어 아래 사회적 소수자의 사랑이 권리의 이름으로 옹호되기도 한다. 다채로운 다섯 꼭지를 읽어나가다보면 오늘날 ‘연애’란 더이상 개인 대 개인이 사랑이란 미명하에 맺는 낭만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인 개인이 타자와 사랑의 감정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 문턱 높은 관문들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윤리적 관계맺음에 관하여
게다가 사회경제적 난관을 헤치고 그/녀와의 ‘밀당’과 ‘썸’ 단계를 거쳐 어렵게 연애에 진입하더라도 사태는 이제 시작이다. 이 안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환상과 욕망뿐 아니라 이상과 가치와 이데올로기까지를 서로에게 투영하며 쟁투한다. 저자들이 연애를 둘러싼 최근의 담론 및 사회경제적 조건과 더불어 중심 논제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들은 연애라는 관계 안에서 인간사회의 근원적 양상을 추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연애를 통해 본 현대사회론이자 보편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야심찬 시도가 얼마나 가슴에 와닿고 머리를 깨우쳐주느냐는 물론 독자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한명의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기획에 글이 조금 못 미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왜일까? 훌륭한 글솜씨, 현대의 쟁쟁한 사랑론에 대한 섭렵, 일상과 타자를 마주하는 섬세한 감각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데도 왜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든 것일까? 사견임을 전제하고 조심스레 말해보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저자 모두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내 욕망과 환상의 일방적 투사가 아닌 윤리적 관계맺음이란 어떻게 가능할까?”(64면) 이 구절에서 마음에 걸린 건 가운데 삽입된 ‘아닌’이라는 부정의 어법이며, 그것은 내 욕망과 환상의 일방적 투사를 부정하는 단호함이다. 아마도 그것을 부정하는 한 저자들이 탐구하는 ‘윤리적 관계맺음’이란 요원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욕망과 환상의 일방적 투사는 연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회피할 수는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연애‘론’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래서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 욕망과 환상의 일방적 투사 속에서 윤리적 관계맺음을 어떻게 찾을까?”
이런 아쉬움과 모자람에도 자기의 몸과 마음과 일상에서 인문학을 시작하려는 저자들의 진지함과 발랄함은 이 책이 일독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대학의 안팎에서 인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하루하루 고투하고 있는 저자들의 건필과 건애(健愛)를 기원하며 짧은 독후감을 마친다.
김항 /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2014.12.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