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제현주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내리막 시대, 나의 일을 찾아서
- 제현주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어크로스 2014
요즘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 가면 문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문 앞에는 월급(80만원~800만원)이 적힌 발 매트가 놓여 있다. 문을 선택해 열고 들어간 사람들은 ‘월급을 기본으로 최대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에코세대)’ X축과 ‘베이비붐 세대 부모가 자녀에게 증여 가능한 최대 금액’인 Y축의 교차점을 찾아간다. <즐거운 나의 집>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리는, 서울 주거 현실 속 개인의 위치를 제시하는 전시 <확률가족>의 관람 방법이다. 온라인상에서는 ‘전시 관람’이 아니라 ‘확인사살’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실제 좌표와 정확한 숫자로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충격이 크다.
전시가 자신의 월 소득을 기준으로 좌표를 삼듯, 모든 개인에게 일자리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백수 생활을 하다가 인턴으로 취업한 후배 하나는 “나도 이제 계획이라는 걸 세울 수 있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10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에 6개월 시한부 일자리였는데도 누군가에게는 그 일자리가 생존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던 후배가 회사생활을 즐겁게 하는 건 아니다. 입사 한달도 되지 않았는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퇴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달고 산다. 제현주의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며, 이 후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닐 터.
취업, 생존… 지금은 ‘표류’의 시대
내게도 ‘원하는 직장에만 들어가면 다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취직이 전부가 아니라 시작’이며, 나를 직장에 100%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대학만 가면 세상이 바뀐다”고 이야기하던 어른들에게 느꼈던 배신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었다. ‘취업 9종 세트’(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 경력, 사회봉사, 성형수술) 없이 취직한 내가 그럴진대, 이 어려운 관문을 뚫고 애써 일자리를 쟁취한 후에 느끼는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일하게 된 후에도 모든 직장인은 ‘자신이 일할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편의점에서조차 ‘열정 페이’를 운운하며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려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 대사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버티는 게 최고”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게 아니겠는가. 실시간 검색어에 ‘공무원 봉급표’가 등장하고, 세대를 막론하고 새해 소망이 ‘일자리’라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또다른 기류가 감지된다.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젊은 농부들』 같은 책이 나오고, 제주도의 순유입 인구가 매년 늘어날 정도로 지방으로 이주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다. 그뿐인가? 협동조합, 마을공동체를 비롯해 뭐라고 규정짓기 어려운 ‘롤링다이스’(전자책출판공동체) 같은 조합까지 새로운 ‘작당모의’를 하는 그룹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하루 종일 아무 할 일이 없다가도 작은 낌새라도 보이면 내 존재를 온통 바쳐야만 하는 국경선의 보초병” 같은 직장인으로서의 인생 대신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는” 인생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KBS의 특정 기수 아나운서가 모두 그만뒀다는 최근 뉴스는 지금이 ‘항해’가 아닌 ‘표류’의 시대라는 걸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다른 꿈
“내가 열심히 탐구하고 욕망하는 건 따로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삶에 대한 가능성이다. 굳이 돈벌이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잘하는 일이 누구나 있다. 내 경우에는 이런 특기들을 내가 사는 풍경에 잘 버무려 풍성하게 삶을 꾸리고 싶다. 작게는 내 삶을 그렇게, 크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더 크게는 친구들과 떼거지로 그렇게 살고 싶다. (…) 무엇이든 자본과 짝짓기 하는 대신, 사람들끼리 활발히 짝짓는 게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풍경이다.” - 윤우 「나는 노는 게 더 좋다」(『일다』 2014.8.20,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오늘도 입버릇처럼 “아, 일하기 싫다!” 혹은 “회사 가기 싫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저자의 조언처럼 “싫다, 괴롭다 토로하는 대신 정확이 어떤 부분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고들” 것을 권하고 싶다. 위에서 인용한 20대 여성이 선택한 길처럼, 저자도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내리막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다. 마음의 상처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유쾌한 상업영화를 만들어가는 영화감독 존 워터스의 제작팀 ‘드림랜더스’나 미들네임이 같은 사람이 모두 ‘사촌’을 뜻하기 때문에 세계 어디를 가도 사촌 집에 머물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속 사회처럼.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느슨한 관계가 있다면 무엇보다 안심이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처럼 다른 틈을 찾아내는 시도, 그리고 그 시도와 실험을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리막 세상에서 노마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물론 그전에, 하고 싶은 것과 그 방식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는 노력, 내 안의 중심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스스로 묻는 것이 먼저다. 내가 중심이 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일 역시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줄 뒤에 서서 기다리는 대신, 새로운 줄을 만드는 방법이야말로 “어떤 미래도 약속받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전략이다. 물론 모두가 이 전략을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명함’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직업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다른 줄을 만든다는 생각을 선택지로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확률 가족> 전시에서 설령 마이너스의 숫자 위에 서 있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을 테니. 마지막으로 저자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본다. “경제적 목적으로 수렴하지 않는 다양한 욕망을 담아내는 곳, 그게 직장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까짓것, 안될 이유 없지 않은가.
정지은 / 문화평론가
2015.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