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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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고착된 인생과 반복되는 감수성, 출구는 어디인가: 영화 [국제시장]

배은경

배은경

<국제시장>이 윤제균 감독의 두번째 천만 관객 영화가 되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한강의 기적’. 60~70년대 고도성장기를 청장년으로 살아내며 과로와 인내, 희생으로 삶의 기반을 닦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천만이라는 관객 수는 그들의 젊은 날을 ‘덕수’라는 한 남성의 생애를 통해 담아낸 웰-메이드 영화로서 <국제시장>이 대중적 인정을 받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개봉 직후 한때 보수 우파 영화 논란도 있었으나, 천만이 현실화되자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헌정한 영화일 뿐이니 정치적 해석은 자제해달라는 감독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모양새다. 물론 이 영화를 해방 70년, 격동의 현대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을 위한 역사교재로 여기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고, 우리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와 세대갈등을 잘 계산한 영리한 문화산업 전략의 승리라는 시각도 있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 이유

 

제목은 ‘국제시장’이지만, 정작 영화는 국제시장 이야기가 아니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70년대초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국제시장이, 아니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전쟁으로부터 만들어진 과정을 간접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내심 이 영화가 그곳에 모여 살던 수많은 ‘덕수들’과 ‘꽃분이들’ 이야기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관계와 삶의 터전으로서의 시장 이야기. 하지만 영화는 그냥 덕수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사실 나는 전쟁 장면을 보면 무조건 운다. 어린 시절 반공, 호국, 보훈의 기치 아래 수없이 읽고 보고 쓴 전쟁의 참혹함 때문에 길러진 성향인 것 같다. 덕수가 탄광에 갇혔을 때는 ‘사북 탄광’을 떠올리며 울었고, 이산가족찾기 장면에서는 며칠을 울며불며 TV를 보았던 여고 2학년 때로 돌아가 울었다. 요컨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 자신의 학습된 감수성을 반복 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당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그 시대의 익숙한 코드들, 획일화된 문화 속에서 체득된 집합적 감수성. 그것들을 그대로 되살려내 그 속에 사건과 기억들을 소재로서 박아넣은 서사구조.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많은 이의 폐부에 호소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불편하다’.

 

나는 이 영화를 국가주의 영화라고 보는 해석에 반대한다. 영화 텍스트에서 제대로 된 국가는 사실 ‘미군’의 형태로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가’는 작동하지 않는 허깨비다. ‘부부싸움 하다가도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한다’로 소개됐던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도 사실 애국심이 아니라, 마누라의 정곡을 찌르는 항의를 집단의례 뒤에 숨어 모면하려는 덕수의 ‘웃픈’ 찌질함이었다. 그는 이미 파독광부 선발에서 애국가를 목청껏 불러 신체검사 떨어진 친구까지 합격시키는 신공을 보여준 바 있다. 덕수에게 국가는 독일이나 월남에 가서 죽도록 고생할 기회를 주는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삶을 꾸려나가는 것은 오롯이 가족의 몫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한국의 고도성장, ‘압축적 근대화’가, 국가가 국민에게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은 채 모든 부담을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이뤄졌다는 바로 그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영화도, 덕수도, 그리고 관객들조차 그 시절의 삶에서 국가의 역할을 환기하지 않는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가족’ 단위의 생존과 계층상승이며, 그 가족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이다. 장남은 아무리 어려도 부재하는 아버지 대신이 되어야 하며,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가족구성원의 보호자이자 부양자가 되어야 한다. 덕수는 그 역할을 최선을 다해 완수했으며, 주변의 여성 인물들은 그러한 그를 사랑하고 돕는다.

 

내가 영화를 보고 느낀 가장 큰 의문은, 가게 ‘꽃분이네’가 그토록 중요한데 영화에 꽃분이는 왜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꽃분이는 고모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술꾼 남편 데리고 그 험한 시장바닥에서 어린 조카들과 올케까지 건사하며 살아낸 그 고모님. 덕수가 독일에서 월남에서 벌어온 돈은 동생 등록금이며 가게 대금, 집값 등의 목돈이 되었을 것이고, 덕수네가 하루하루 살아낸 기반은 오롯이 그 고모가 일궈낸 ‘가게’ 에서 나왔을 터. 고모가 없었다면 덕수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그 고모의 죽음은 어찌 그리도 매정하게 처리되며, 어째서 덕수의 회한 속에 고모는 한 자락도 남아 있지 않을까.

 

반성 없이 찬양되는 가부장적 삶

 

알고 보면 덕수는 여복(女福)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설사 덕수 니가 불타는 집 속에 있더라도 너를 구하러 가서는 안되는 게 나머지 새끼들에 대한 에미의 책임이다.” 부재하는 아버지 대신 전후 한국 가족을 끌어온 수많은 억척어멈들처럼 덕수 어머니의 강단은 대단하다. 덕수의 부인인 영자는 또 어떤가. 그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고집불통 할아버지 덕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산다. 그녀가 덕수에게 항의하는 장면은 딱 한번 나온다. 월남에 가겠다는 남편에게 하는 명대사. “당신 인생인데 왜 거기에 당신이 없소?” 자신과 자식들을 돌보지 않는 남편을 원망 한번 하지 않는다. 그녀의 안타까움은 오직, 덕수가 덕수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족 가치’는 반성 없이 찬양된다. 가족 이외의 사회적 관계는 모두 헛것이다. 개인은 가족 단위로 똘똘 뭉쳐야 하고, 그 목표는 번듯한 집에서 중류층 이상의 부를 누리는 것이다. 덕수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냈지만, 그러느라 힘들었던 자기 자신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오늘날 아무데나 성질을 팍팍 내는 꼰대 할아버지가 되었다. 덕수의 삶은, 그 세대의 수많은 장남/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마냥 바람직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덕수는 평생을 과거에 묶여서 살아온 인물이며, 너무 일찍 위임받은 가부장의 지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삶도 갖고 있지 않다. 덕수의 인생은 흥남부두의 그 이별 장면에 완전히 고착돼 있다. “아버지 없으면 네가 가장.” 덕수는 아버지의 저 말에 사로잡혀 살았다. 가부장이 되라는, 사랑과 신뢰와 기대에 가득 찬, 그렇지만 덕수 개인에겐 저주에 가까웠던 그 주문. 덕수에게 자기 삶은 무엇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말하지 않고 묵묵히 희생했지만, 그가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은 다시 제자리다. 주문의 최초 발설자에게 돌아가 헛되이 인정을 추구하는 슬픈 몸짓. 영화 속에서 덕수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힘듦을 토로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었다.

 

소통과 관계로 서로 돕는 개인들의 사회를 상상하려면

 

덕수가 이해받지 못하고, 아들딸로부터도 잔소리만 듣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본인이 자초한 면이 있다. 본인이 말하지 않았으므로, 자기 입으로 말함으로써 자기의 힘듦을 대면하기를 회피해 왔으므로. 소통해야 할 때에 화를 내거나 입을 다물거나 거짓말을 함으로써, 덕수는 그야말로 ‘가부장적 자아’를 만들어왔다. 소통이 없으면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도 지지도 없다. 소통이 없으면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다. 성찰 없는 삶은, 아집과 독선만 낳는다. 덕수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외면한 채 타자의 욕망과 가치에 대한 책임감으로 구성된 단단한 외피를 쓰고 세상과 맞서 싸워온 세월. 그 세월, 그 삶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부장적 남성성은 전쟁과 산업화의 격동을 통해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경제대국이고, 신자유주의 질서는 노동과 젠더의 관계를 쉴 새 없이 재편하고 있다. 가부장적 남성성의 기반은 급속도로 해체되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이 영화가 제시하는 남성의 삶을 제대로 성찰하지 않아도 될까. 영화가 찬양하는 가부장적 남성성과 그것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는 대중의 정서가 나는 심히 우려스럽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머리가 아플 만큼 울었다. 그 시대가 아파서, 덕수의 고통이 전해져서, 영자의 사랑이 아름다워서 울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덕수는 흥남부두에 고착되어 있고, 영화는 80년대 중반까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당시의 문화 코드로 재현한다. 감수성은 반복되고, 인생은 제자리에 묶여 있다. ‘한강의 기적’과 가부장적 남성성. 출구는 어디인가?

 

 

배은경 / 서울대 사회학과·여성학협동과정 교수

2015.1.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