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세상의 다른 법칙: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고
비참과 굴욕이 증대하는 세계 현실에서 ‘연대’는 당연한 윤리적 요청이 되고 있다. 그런데 연대는 그렇게 당연하고 자명한 요청일까. 그리고 우리는 언제든 거기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인간 사이의 연대를 증거하는 특별하고 감동적인 예들을 우리는 안다. 그 사례들은 타인의 고통과 비참, 굴욕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거기 손을 내미는 일이 전혀 예사롭지 않으며, 때로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거스르거나 넘어서는 숭고한 행위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가지 않아도 될 테다. 작으나마 경제적인 도움이나 개인적 수고로움을 통해 연대의 마음을 표하고 실행하는 길도 있다. 공동체의 구조를 상호부조와 연대의 정신에 맞게 만들어가려는 다양한 시민적 참여의 행동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점점 스스로도 지켜나가기 만만찮은 개개인의 자유와 자원을 나누는 도덕적 윤리적 결단이 있다. 그런 만큼 연대의 서사는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해체되는 우리의 삶을 공동체의 지평 속에 붙잡아두는 최소한의 근거, 조금 상투적인 표현을 쓴다면 희망의 근거가 된다. 굳이 ‘희망’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약자들의 고통은 연대의 요청을 급박하고 절실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너나없이 말한다. 그 요청에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고.
연대는 어디서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나 연대의 요청이 절실해지는 현실은 그 요청에 대한 응답도 어렵게 한다. 사태를 너무 과장할 이유는 없겠지만, 삶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지키는 것은 이제 많은 이들에게 참으로 버겁고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특히 불안한 노동현실은 줄어드는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을 격화하는 가운데 가장 절실히 연대가 필요한 곳에서 연대의 인간적 물적 토대를 앗아가고 있다. 그럴 때 연대는 어디서,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 현실의 비참과 인간 윤리의 딜레마를 일관되게 증언하고 탐구해온 벨기에 출신 다르덴 형제의 최근작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이 사려깊게 묻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 원제의 ‘이틀 낮과 하룻밤’은 주인공 산드라가 일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틀의 주말 동안 직장동료들을 만나 자신을 위해 투표해달라고 부탁하는 힘겨운 시간을 말한다. 우울증으로 휴직을 해야 했던 산드라는 복직을 하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빈자리를 계약직 사원으로 채워놓은 사측은 그녀의 복직을 팀원 16명의 투표에 맡기는 방식으로 처리한다(이곳은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다).
산드라의 복직과 천 유로의 보너스가 선택지로 주어진 잔인하고 비열한 방식의 투표에서 14명이 보너스를 선택하고 산드라의 복직은 좌절된다. 그러나 산드라를 돕는 동료 줄리엣이 투표과정에 반장의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재투표의 길이 열리고, 산드라에게는 동료들에게 호소해볼 수 있는 주말 이틀의 시간이 주어진다. 자포자기 상태로 쓰러져 있던 산드라를 일으키는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은 가혹하다 싶게 현실을 일깨운다. “당신의 월급이 없으면 주택대출금을 갚을 수 없어.” 산드라 역시 두 아이를 다시 임대주택에서 키우고 싶지는 않다[초기작 「로제타」(Rosetta, 1999)에서 로제타가 와플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알코올중독에 빠진 어머니와 함께 살던 트레일러 집이 떠오른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표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천 유로를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전화를 걸고, 버스를 타고, 남편이 모는 차에 올라 동료들의 집을 찾는 산드라의 모습을 따라간다. 걸어갈 때면 카메라는 주로 산드라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힘을 모아 빨리 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려도 무방하다 싶게 무력하고 막막한 한 인간의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거기 있다. 다르덴 형제 특유의 밀착된 카메라는 산드라의 거칠고 힘겨운 숨소리와 목마름을 고스란히 전한다. 축구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티무르(영화 속 산드라의 동료들은 대개 주말을 끼고 다른 일을 한다)는 울음을 터뜨리며 보너스를 택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만(“계속 맘에 걸렸어, 미안해, 와줘서 고마워”), 가장 친한 동료였던 나딘은 집에 있으면서도 산드라를 만나주지 않는다. 천 유로는 일년치 가스비와 전기세고, 아이들의 학비다.
한 장면만은 꼭 말해두고 싶다. 이틀째 일요일 밤, 산드라는 알퐁스(아프리카계 이민자로 보인다)의 집을 찾는다. 세탁소에 갔다는 어머니의 말에 이어, 알퐁스의 어린 여동생이 길 안내를 자처한다. 허름한 도시 외곽, 아이가 앞서고 산드라가 뒤따르는 한밤의 동행.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이 장면을 조금 길다 싶게 멀리서 보여주는데, 그냥 너무 아름답다. 이 고단하고 험한 세계 속에도 이런 순정한 환대의 순간은 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쉽지 않은 선택과 결단을 보여주는 동료 안느도 있다(남편과 산드라, 안느가 좁은 차 안에서 부르는 ‘글로리아’의 합창은 말 그대로 그 순간의 돌연한 기쁨과 행복, 승리를 찬미한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러지 못한(“널 반대한 게 아냐. 보너스를 택한 것뿐이야”) 다른 동료들의 착잡한 선택도 그이들의 현실에서 느끼고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그 점이 언제든 구조나 시스템의 문제를 인간 안에서, 쉽게 재단하기 힘든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와 함께 고민해온 다르덴 영화의 힘일 테다.
창조되는 연대성
인간 사회의 잔인성이 점차 감소되기를 바라지만, 그 소망을 역사의 필연 위에 두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의 우연성을 직시하는 가운데 자신의 희망을 “그렇듯 근거지을 수 없는 소망 속에 포함시키는” 사람을 일러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 뒤 리처드 로티는 그런 인물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제안한 바 있다(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김동식 이유선 옮김, 민음사 1996). 그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연대성’은 자명한 것,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진리 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곱씹게 되면서, 나는 왠일인지 그의 다소 냉소적인 태도에서 전에라면 느끼지 못했을 겸손한 현실주의를 본다.
“나의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연대성은, ‘편견’을 제거하거나 혹은 이전까지는 감추어졌던 깊은 곳을 캐냄으로써 인식될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상상력, 오히려 성취되어야 할 하나의 목표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탐구가 아니라 상상력,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들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연대성은 반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낯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의 특정한 세부 내용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창조된다.”(리처드 로티, 위의 책)
그 상상력의 하나를 다르덴 형제는 보여주었던 것일 테다. 다르덴 형제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그것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것이다.”(다르덴 형제 인터뷰, 『씨네21』)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5.1.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