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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

문학은 게임입니다
- 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

 

 

corta훌리오 꼬르따사르(Julio Cortázar)의 소설집 『드러누운 밤』(La noche boca arriba, 한국어판 박병규 옮김, 창비 2014)에 실린 단편 「비밀 병기」(1958)의 첫 문장을 읽고 한시름 놓았다. 이 꼬르따사르는 내가 기다린 그 꼬르따사르가 맞았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침대 정리는 그저 침대 정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악수는 언제나 같은 악수라고 생각하며, 정어리 통조림 한개를 따는 것은 그와 동일한 정어리 통조림을 무수히 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꼬르따사르의 소설을 읽으며 가장 자주 발생하는 일은 수면이다. 잠든다는 말이다. 꼬르따사르 역시 대부분의 작가가 가진 독자를 잠들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능력치는 그중에서도 최상이다. 얼마 전에 만난 서평가 금정연은 졸려서 꼬르따사르의 소설을 못 읽겠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늘 잠이 부족하다. 잠은 자도 자도 부족한 상황인데 꼬르따사르가 소설을 이렇게 쓰는 건 우리에게 부족한 잠을 자라는 뜻인가,라고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 번역가가 되어

 

박훌요는 내게 1985년 범조사에서 나온 꼬르따사르의 단편집을 선물로 주었다. 『드러누운 밤』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에서 출간된 유일한 꼬르따사르의 책으로 그전까지 우리는 꼬르따사르의 작품을 인터넷에 떠도는 조각들로, 중남미문학선에 포함된 일부로만 접할 수 있었다. 보르헤스의 책이 십수권 나오고 가르시아 마르께스와 요사의 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와 동급이라는 꼬르따사르의 책은 왜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후안 룰포와 비오이 까사레스와 에르네스또 싸바또의 책까지 출간된 판국에 말이다. 책의 해설에 있는 꼬르따사르의 명성에 대한 설명은 우리의 애간장을 녹였다. 약을 올리려고 꼬르따사르의 위대함을 자꾸 말하는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박훌요와 금정연 등과 나누었다.

 

우리 중 가장 열의가 넘쳤던 이는 박훌요였다. 그는 날이 갈수록 훌리오 꼬르따사르에게 집착했는데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박정수에서 박훌요로 개명하고 아르헨띠나로 여행을 떠났으며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베르또 볼라뇨의 소설과 니까노르 빠라의 시를 번역했으며 최근 들어 꼬르따사르의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꼬르따사르의 소설이 뒤로 밀린 건 그의 소설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훌요가 처음 번역한 꼬르따사르의 소설은 『드러누운 밤』에도 실려 있는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로, 그는 이 단편을 번역해 ‘서울생활’이라는 이름의 싸이트에 연재했다. 그러니까 나는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1951)를 『드러누운 밤』이 아니라 박훌요의 연재에서 먼저 읽었다.

 

꼬르따사르의 뒤를 따르는 동안 박훌요는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그는 무직이고 미혼이며 집도 없고 수입도 없고 애인도 없고 변변한 경력도 없다. 박훌요의 공부는 박사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도 아니고 통역가가 되기 위한 공부도 아니다. 박훌요가 번역한 소설을 내줄 출판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페인어 전공자가 아닌 그에게 누가 번역을 맡길 일도 없다(심지어 그는 경제학 전공이다). 그는 왜 골방에서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읽어봤자 열댓명 정도가 읽을 소설을 번역하고 있는 것일까. 훌리오 꼬르따사르가 뭐길래. 단지 한명의 작가가, 또는 소설이 뭐길래 우리의 삶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것일까.

 

환상 속의 그대

 

꼬르따사르는 꼴레주 드 빠따피지끄(collège de ’pataphysique)의 회원이다. 이곳은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자리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무리가 만든 학회로 “쓸데없는 학문적 연구”를 목표로 한다. 파타피직스(pataphysics)는 거칠게 말하면 사이비 과학이다. 현실 속의 환상을 연구하며 환상 속의 현실을 탐구한다. 다시 말하면 현실과 환상의 동거를 연구한다. 특히 꼬르따사르의 파타피직스가 그러한데, 아주 쉬운 예를 동양에서 찾는다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들 수 있다. 꿈에서 나비가 된 장자는 묻는다.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이와 거의 동일한 상황이 표제작 「드러누운 밤」(1956)에서 일어난다. 다른 단편에서도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일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꼬르따사르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장자와 다르다. 그의 작품에서 환상은 현실을 잡아먹는다. 처음에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조금씩 틈입하던 환상이 어느새 현실의 커다란 일부가 되고, 종래에는 환상이 현실이 된다. 현실이 된 환상은 환상인가 현실인가. 더구나 꼬르따사르의 환상은 돼지 꼬리가 있는 아기가 태어나는 따위의 환상이 아니다. 그의 환상은 훨씬 현실적이며 불안한 공포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우리는 가끔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상을 한다. 이런 상상의 대부분을 기우라고 하지만 꼬르따사르의 소설에서는 기우가 현실이 된다. 기우는 「맞물린 공원」(1956)의 남자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머리에 칼을 꽂는다.

 

나는 태어나서 단 두번 가위 눌렸는데 며칠 전에 한번 더 그랬다. 『드러누운 밤』을 읽다가 생긴 일이다. 이 작품집이 무서운 내용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인신공양이 나오고 유령(또는 그와 유사한 존재)이 출몰하고 점박이도롱뇽으로 변해버린 인간이 등장하지만 무섭진 않다. 다만 잠이 온다. 「드러누운 밤」의 남자가 잠이 들듯 잠이 온다. 가위에 눌린 꿈에서도 나는 『드러누운 밤』을 읽고 있었다. 꿈에서도 책을 읽고 깨서도 책을 읽으면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깨어 있던 것인가, 자고 있던 것인가.

 

아무튼 박훌요는 요즘 꼬르따사르의 장편 『팔방놀이』(Rayuela, 1963) 번역에 매진 중이라고 한다. 그가 어쩌다 무직의 번역가 겸 작가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훌리오 꼬르따사르는 이 모든 게 게임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게임입니다. 다만 이 게임은 삶을 통째로 쏟아부을 수 있는 게임입니다. 우리는 게임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The Paris Review, 1984년 가을호) 박훌요는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문학이라는 게임-꿈에서 깨(지 않)기를 바란다.

 

 

정지돈 / 소설가

2015.3.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