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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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세네카 『베풂의 즐거움』

세네카를 읽으며 복지를 생각하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베풂의 즐거움』

 

 

seneka막 번역 출간된 세네카의 『베풂의 즐거움』(김혁 외 옮김, 눌민 2015)을 읽기 시작한 것은 마침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4월부터 무상급식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때였다. 그 와중에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이 아들 일로 관심을 받으면서 덩달아 합법체류 자격이 없는 아동들에게 교육권을 주게 되어 있는 법안을 두고도 새삼 논란이 이는 모양이다.

 

비판의 요지는 ‘내’가 낸 세금을 대한민국에 대해 동등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저들’에게 사용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중 미등록노동자들은 다른 인구집단에 비해 음주와 흡연 비율이 높아서 이미 큰 비율로 교육세를 납부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자녀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상당히 참신한 반론도 있었다. 사실 논쟁을 따라가다보면 목소리가 높은 쪽은 스스로 세금을 많이 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사안마다 저들은 내가 낸 세금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를 두고 시끄럽다. 그나마 무상급식이 시행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애들에게 밥 한끼 먹이는 일”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염치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복지 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주자를 공격하거나 에이즈 환자의 자기책임 문제를 걸고넘어진다.

 

‘은혜’는 선물이 아니며 시혜도 아니다

 

제목만 보면 오해하기 딱 좋지만 세네카(L. A. Seneca)의 『베풂의 즐거움』은 단순히 베푸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 아낌없이 베풀라는 책은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은 네 것이 아니니 아까워하지 말고 베풀면서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대신 받은 것은 꼭 갚고, 남에게 얻어먹기보다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식의 일반적인 도덕률에 대해서라면, 부자들의 사회기여에 대한 칭송이나 기부와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이 이미 넘쳐나는 중이다. 이러한 책들이 베푸는 쪽의 기쁨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세네카의 특별함은 “은혜 입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에서 나온다. 아낌없이 베풀 줄 알고, 기꺼이 갚을 줄 알며, 은혜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관계, 그래서 은혜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세상이 그가 꿈꾸는 인간사회의 모습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지만, 이는 반드시 재물로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돌려줘야 할 빚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은혜 자체는 감사하는 마음만으로도 갚을 수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입으라는 것이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의 주장이다.

 

이렇듯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상당부분 사회적 통념을 뒤엎는 데서 온다. 그렇다고 내용이 딱딱하고 읽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부모의 은혜와 함께 자식의 은혜를 논한다든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은혜는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등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은혜의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은혜의 관계와 효과, 방법, 금기, 보답, 배반 등 그야말로 은혜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측면을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책 한권을 채웠음에도 읽기에 지루하지 않다. 특히 세네카는 은혜가 부채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은혜란 “기쁨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기쁨을 얻으며,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기꺼이 준비하는 선의의 행동”이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은혜를 입으면 돈이나 관직 등을 빚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은혜의 재료일 뿐 은혜 자체는 재료 너머에 존재하는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은혜는 선물을 도구로 할 수 있지만, 선물 자체는 은혜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라며 무자비하게 구는 사람은 은혜를 잘못 베푼 사례로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저버리게 되는 것은 은혜를 베푼 사람의 책임인 경우가 많다. 반면 은혜를 베푼 자가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은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은혜가 희미해져서 갚을 빚이 없어질 수는 있으나 무엇으로도 애초에 은혜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은혜는 잊어도 빚은 남는 게 상식이지만 세네카는 빚은 갚지 않아도 되지만 은혜는 입었으면 반드시 갚으라고 말하며, 심지어 빚을 갚았어도 은혜는 남는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듯 은혜가 단지 일방적인 시혜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 주된 내용임에도, 베푸는 인간인 호모 베네피쿠스(homo beneficus)를 강조하는 이 책이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기부와 나눔의 기쁨을 강조하는 또하나의 착하고 아름다운 책으로 오독될 가능성 역시 크다고 본다. 그런 우려의 근거는 은혜나 베풂을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세네카가 우려한 대로 이미 매우 제한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쟁이 결국 비용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기여는 그가 벌어들인 돈으로 환산되며, 내가 받는 혜택이라는 것 역시 물질적인 차원에서 주로 논의되는 현실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인이 가진 베풂에 대한 생각은 세네카가 말하는 은혜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은 거꾸로 우리가 세상에 빚진 것은 무엇이고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이며, 또 무엇을 왜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라 하겠다. 복지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든 ‘공유경제’든, ‘호혜성의 원리’든 간에 주고받은 것을 셈하는 방법이 천박하고서야 제대로 작동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내 것이 누군가의 은혜일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번역한 김혁·오명석·홍석준·안승택 4명의 경제인류학자들 역시 최근 대안적인 사회형태와 경제원리, 윤리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의 논지를 비판적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이 책 말미에 실린 ‘역자의 글’에 드러난다. 모스가 순수증여 자체를 이데올로기로 보고 그 저의에 의혹의 시선을 보낸 데 반해, 세네카는 주고받는 과정에서 증여물 자체는 은혜의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공놀이를 할 때 주는 공을 받지 않거나 상대방이 받을 수 없게 너무 세게 던지면 놀이는 곧 끝날 수밖에 없다. 대신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좀더 세게 던진다 하더라도 재미있게 오랫동안 공놀이를 할 수 있듯이 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과정 자체에 대한 숙고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 그리고 주고받는 감각 자체에 대한 배양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세네카를 통해 역자들이 우리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세네카의 『베풂의 즐거움』은 베풂에 대한 권유로 끝나지만 그가 말하는 베풂의 원형은 사실 신, 혹은 태어나면서 우리가 받은 것, 살면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전 세대가 남긴 것으로부터, 이후 세대의 존재로부터,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 모든 노동으로부터, 그 이전에 생명을 가능하게 한 자연으로부터 온 모든 것이 은혜임을 잊지 말고, 그렇게 받았으니 아낌없이 베풀라는 것이 세네카의 가르침이다. 그가 말하는 만악의 근원은 배은망덕이지만, 사람들이 잊은 은혜의 대상은 높은 곳을 향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네카에게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고마운 대상이 신과 함께 노예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하고 어린이기도 했다면, 우리 사회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은혜 역시 기부와 자선을 베푼 사람, 세금을 더 낸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본디 내게 속해 있지 않은 것을 나누면서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면, 받는 사람이 감사하지 않고 심지어는 원한을 가진다고 해도 그 책임은 베푼 쪽에 있다고 세네카는 지적했다. 물론 내 삶이 빚지고 있는 자리를 통해 베푼다는 생각 없이도 기꺼이 베풀고, 빚진 적 없이도 기쁘게 은혜를 느끼고 갚는 사회란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실상 내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타자의 노동과 배려로부터 입은 은혜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결코 제도로만은 이룰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지사회일 것이기에,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문화인류학

2015.3.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