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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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권보드래 외 『1970, 박정희 모더니즘』

대중-문화로 살펴본 유신시대와 그 유산
-권보드래 외 『1970, 박정희 모더니즘』

 

 

1970 park1990년대 후반의 IMF사태와 맞물려 나타난 이른바 ‘박정희 씬드롬’은 박정희체제가 여전히 세대를 넘어서 현재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이미지와 (무)의식에 끈질기게 간섭하는 존재임을 드러낸 현상이었다. 적어도 이 시점을 이후로 박정희시대의 유산을 살펴보거나 평가 혹은 극복하려는 작업은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관심의 차원을 배제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에 박정희시대와 그 유산에 대한 해묵은 인식을 극복하는 작업은 확실히 시간을 다투는 과제로서 많은 이들의 의식뿐 아니라 마음 또한 다그쳐온 듯하다. 『1970, 박정희 모더니즘: 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천년의상상 2015) 또한 그러한 박정희시대에 대한 현재적 관심을 대중적 차원에서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다.

 

‘산업화 대 민주화’, ‘빵과 자유’와 같이 낡을 대로 낡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을 옭아매고 있으며 그 자체로 박정희시대의 나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서기 위해서 이 책의 필자들(권보드래 천정환 황병주 김원 김성환)이 제안하는 방법론은 꽤나 명쾌하다. 그것은 ‘대중’과 ‘대중-문화’라는 관점에서 1970년대를 바라보고 그 유산을 따져보는 일이다. 이는 경제(산업화)와 정치(민주화)적 층위에 얽매인 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안일 뿐 아니라, 시민이나 민중·민족 같은 기존 역사인식의 규범적 범주들은 물론 지식인 중심의 계몽적 담론들을 유보한 상태에서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이 지배했던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욕망(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신의 모더니즘’과 문화연구의 현주소

 

대중의 일상적 삶과 욕망으로부터 살펴볼 때에 독재권력이 관철하고자 했던 ‘조국근대화’와는 또다른 양상의 근대(화)의 모습들과 조우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유신(시대)의 모더니즘’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최근 십여년 이상 적어도 한국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해왔고 어느새 익숙하게 된 대중문화 중심의 문화론적 연구 방법론과 그러한 방법론의 밑바탕에 깔린 문제의식들을 재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지식인 혹은 전위적 계급 중심의 계몽적 담론이나 고급문화·문학에 편중된 논의방식에서 벗어나 대중의 삶과 문화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확대라는 문제의식과 겹쳐서 읽어내고자 했던 것이 그간 문화연구의 경향이었다고 요약해도 크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0, 박정희 모더니즘』은 그다지 두껍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인문학계가 십여년 이상 축적해온 방법론적 성과와 그 두께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박정희시대의 망령과 그에 대한 이해방식과의 대결을 통해 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온 지적인 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점검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유신시대의 모자이크 형상과 대중의 내러티브

 

‘대중’이나 ‘대중-문화’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박정희시대의 근대화 과정을 일상적인 삶과 욕망의 수준에서 고찰해보자는 이 책의 문제 설정은 텔레비전의 보급, 영화 검열, 『선데이서울』, 통기타와 청바지가 상징하는 청년문화, 스트리킹, 독서운동 등의 다양한 소재와 26개에 이르는 짧은 글들을 통해서 논의된다. 이러한 구성은 이 책이 신문에 연재되었던 원고들을 묶어놓은 데에서 비롯한 불가피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서술방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유신시대의 대중-문화와 대중의 삶의 형상에 대한 일종의 모자이크적 구성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산만하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글들이 만들어낸 모자이크 이미지와 메시지는 선명하다. 필자들이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박정희시대의 통치성과, 대중-문화 그리고 자본의 관계가 이율배반적이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 책은 박정희시대의 개발독재가 자본과 대중을 강력하게 규제했던 것과 동시에 국가권력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매트릭스였다고 이야기한다. 또 대중은 대중문화를 통해서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시에 권력의 의도를 배반하거나 초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중은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자신만의 내러티브마저 가지고 있다. 얼굴 없는 익명의 “도시-하층-남성”의 형상을 취한 그들은 파업 중인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붓고, “『선데이서울』의 음란증에 킬킬대고, 호스티스 영화를 보며 휘파람을 불”고 “개발독재 정권에서 ‘강자’의 몫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과 동시에, 대마초나 통기타, 스트리킹을 통해 혹은 높은 자살률을 통해 불만과 저항을 표출했다. 1979년 유신이 그 종언에 이를 무렵 부마항쟁에서 해방과 저항의 주체로서 출현한 존재 또한 마찬가지로 대중의 형상이었다는 이야기로 이 책은 마무리되는데, 산업화나 민주화의 내러티브로 손쉽게 환원하기 어려운 대중의 내러티브도 그렇게 일단락된다.

 

무엇 하나로 환원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뒤죽박죽 뒤얽힌 수많은 얼굴들이야말로 빵과 자유 혹은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과 같은 인식소들을 걷어낸 뒤에 필자들이 ‘대중’이라는 또다른 키워드로 포착해낸 “유신의 모더니즘”의 구체적 형상이자 근대화 속에 내던져진 삶의 이미지인 셈이다. 필자들은 이 형상(들)을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과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씬드롬, 일베 현상과 겹쳐 읽는 가운데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기존의 인식소들을 걷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상의 발견이 단순히 발상의 전환이나 지적인 조작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화냐 민주화냐’ 같은 도식을 가능케 했던 박정희시대 이후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다다른 파국에 대한 인식이 필수불가결하다.

 

 

김수림 / 문학평론가

2015.4.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