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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정혜신 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
-정혜신 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chunsa“우울할 땐 절대 보지 마. 나 그냥 읽었다가 펑펑 우느라 아무것도 못했어.” 친구가 이 책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창비 2015)와 함께 건넨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기록을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2015)을 받고도 한참 동안 펼쳐보지 못하고,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한 것도 다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일까, 시인 진은영이 묻고, ‘거리의 의사’ 정혜신이 답한 이 책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읽힌다.

 

1년 전, 꼭 이맘때 찾았던 안산 합동분향소의 공기를 기억한다. 그 많은 영정사진 앞에서 훌쩍이며 꽃 한송이 바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력감은 생각보다 강력했고, 세월호 뉴스를 회피하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렀다. “무사히 돌아오라”며 거리에 빼곡하게 붙어 있던 그 간곡한 현수막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일베의 폭식투쟁을 비난하고, 유가족에게 “이제 그만하라, 지겹다”고 힐난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1년이었다. 시간에는 ‘설익은 시간’과 ‘숙성된 시간’이 있다는데 적어도 ‘세월호’라는 단어 앞에서만큼은 한국사회의 시간은 아직 ‘설익은 시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이 ‘설익은 시간’이 ‘숙성된 시간’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2014년 4월 16일의 시간에 삶이 정지되어 있는 유가족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

 

얼마 전 세월호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배를 타고 1시간 반 거리의 섬을 다녀온 적이 있다. 가까운 섬이라 그런지 TV로 틀어놓기라도 하는 안전 관련 안내는 아예 없었다. 구명조끼가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그것들이 있다는 선반을 발견했지만, 그 안에 정말 쓸 만한 구명조끼가 있긴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신분증을 확인한 건 표값 할인을 위해서였지 승선자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할인 대상이 아니라면, 누가 탔는지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나마 배에 실은 차의 바퀴를 고정한 밧줄이 보이는 것 정도가 달라진 점이었다. 불안을 애써 감추며 섬에 다녀온 후 ‘결국 달라진 게 없다’고 무력감에 다시 빠져드려는 내게 이 책은 처방전과도 같았다. 큰 고통과 불행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무기력한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조언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라고 눈물을 흘려주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행동도 타인에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에는 비겁했던 나에게도 할 일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이 거대한 트라우마에 대한 물음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하필 4·16 1주기 당일에 국빈 방문도 아닌 해외순방을 떠나 ‘세계여행 전문가’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대통령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왜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지, 트라우마란 무엇인지…… 사려깊게 건네는 질문과 조근조근 마음을 담아 답하는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출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잦아든다.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라는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스트레스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의 아픔에 해당한다면, 트라우마는 ‘아픈 만큼 파괴된다’는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된 것도 중요하다. ‘죽음 각인’이 핵심인 트라우마는 견디며 살아갈 상처이지 극복되는 상처가 아니며 삶이 전반적으로 깨어진다는 점에서 인간이 통제 가능한 영역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은 후에는 그 마음을 치유하지 않는 이상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고통의 강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광주 5·18 피해자들의 자살률이 한국 평균 자살률의 500배에 달한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때만 분노하고 안타까워했을 뿐, 어떻게 사회가 이 상황을 공적으로 해결하고 치유하는지 겪어본 경험이 없다보니 트라우마 그 자체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트라우마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상처 받은 개인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것은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부모를 총탄에 잃은 개인 박근혜의 트라우마가 치유됐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라!).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인 셈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은 ‘진상규명’이다. 근원적 요소인 외부 요인에 대한 명명백백한 정리가 선행되어야 그 이후에 피해자 개인의 상실감과 슬픔, 고통 등을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치유 역시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집밥을 나눠 먹고 시금치를 키우고, 함께 모여앉아 뜨개질을 하고, 방음장치가 된 방에 들어가 마음껏 울고…… 안산에 마련된 치유공간 ‘이웃’에 대한 설명이 반갑다가도, 의사 개인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세월호참사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하나의 점으로 남지 않고, ‘우리 옆집에 사는 천사들’과 연결되어 선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연결한 선들이 모여 치유의 공기로 만드는 것이 국가가 잊지 않고 해야 할 일이다.

 

지난 주말, 경찰이 집회현장에서 “사랑하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라고 반복해서 방송하자 “그 가족들이 다 죽었다고……” 유족들이 대답하며 울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무참해지던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그리고 늦었지만 가방에, 그리고 내 마음 한켠에 노란 리본 하나를 달려 한다. 노란 리본 배지를 달았다는 이유로 고등학생을 불심검문한 경찰이 “되도록 그거 떼고 다니는 게 어떻겠냐”라고 했다는 그 노란 리본 말이다.

 

*본 서평의 제목 ‘천 사는 여기 머문다’는 전경린의 동명 단편에서 따옴.

 

정지은 / 문화평론가

2015.4.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