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노동시장 구조개혁, 국가가 먼저 믿음을 주어야
현 정부하에서 노·정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2013년 철도노조 파업 당시 민주노총 침탈 사건이 박근혜정부의 노동철학을 예측해볼 가늠자였다면 집권 3년차를 맞아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은 그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민주노총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반발하여 노사정위를 탈퇴한 한국노총은 지난해 8월 복귀를 선언하고 노동시장 구조개혁 논의에 착수했다. 사회적 대화를 강조해온 한국노총의 기본입장을 고려할 때 오늘날 우리사회가 당면한 양극화 해소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 총연맹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당 대표는 물론 대통령까지 나서 노사정 대타협을 독려했지만 4월 8일 한국노총은 “노총의 5대 수용불가 사항에 대해 정부와 사용자측의 입장 변화가 없어 대타협에 실패했다”고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노동조건을 크게 훼손하게 될 정부 안
노동계가 수용불가를 밝힌 5대 쟁점은 △해고요건 완화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요건 완화 △비정규직 규모 확대 △임금 피크제 및 임금체계 개편 △노동시간 연장 등이다. 이 쟁점들이 법제화된다면 ‘더 쉬운 해고와 더 낮은 임금, 더 많은 노동시간과 비정규직 확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협상 결렬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즉각 유감을 표했고, 정부는 결렬의 최대 쟁점인 ‘해고요건 완화와 취업규칙의 임의변경’을 정부 지침으로 시행하겠다고 주장함으로서 협상 결렬의 주체가 정부였음을 자인했다.
해고요건과 취업규칙은 개별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 및 노동조건을 규정하는 노사관계의 핵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통해 고용과 임금 및 노동조건을 결정한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호소처럼 노동조합조차 결성할 수 없는 미조직 노동자들은 국가가 정한 최저 노동조건인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는다. 우리 헌법에 명시된 노동3권은 민주주의 국가의 보편적 국제기준을 반영한 것이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필라델피아 선언은 불안정노동이 독재국가를 출현시킬 수 있고, 일국 차원의 사회적 불안이 국제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될 수 없으며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에만 해고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자는 일반해고 요건이며, 후자를 정리해고 요건이라 한다. 정부 안대로 일반해고 요건이 완화된다는 것은 ‘정당한 사유 없는 해고가 일반화’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한다면 굳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더라도 해고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임금과 노동조건을 명시한 취업규칙 역시 노동조합이나 근로자 과반수 동의 없이 불이익하게 변경할 수 없도록 법에 명시하고 있는데 이 조건을 완화한다면 노동조합의 동의 없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하락시킬 것이다.
역대 대부분의 정권이 사용자 친화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정책을 시행해왔으나 이처럼 근본적으로 헌법과 국제기준을 부정하는 내용과 방식은 없었다. 이런 배경에는 정부와 재계가 주장하는 이른바 ‘정규직 과보호론’이 있다. 나날이 힘들어지는 국민의 삶과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노조를 방패막이 삼아 호사를 누리는 정규직들이야말로 경제위기의 주범이라는 이미지를 심기에 충분하다. 정규직노동자들은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을 양산하는 주범이라는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하면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보호와 함께 제대로 된 노사정 합의로
정부나 재계의 주장대로 정규직이 누군가로부터 과보호되고 있다면 그것은 개별기업을 의미할 것이다. 바꾸어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기업에 속해 있어야만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생산자이고 소비자이며 납세자인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라는 해고노동자들의 절규는 노동시장에서 퇴출될 경우 개별노동자가 어떤 처지에 빠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적 의료보험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곧 의료보험 사각지대에 빠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안전망이 없는 우리의 경우 정규직 과보호론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국가의 미보호가 대타협을 불가능하게 한다. 노조조직률이 10% 미만으로 급전직하한 현실에서 10%의 보호를 푼다고 나머지 90%가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법은 다시금 국가의 역할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협상 결렬 원인이 정부에 있었다는 지적은 “노사정 대타협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협상 목적이 비정규직문제 해결과 청년실업 해소에 있었는지, 아니면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명분에 불과한 것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상대방이 다른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는 순간 어떤 교섭도 진전을 이룰 수 없다. 정부 주도로 노동조건 개악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거두고 애초 설정한 의제에 충실하겠다는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식 노동유연화 공세가 오늘날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인이라면 3개월이라는 짧은 논의시한을 못 박고 한쪽을 압박하는 것도 협상 결렬의 주요원인임을 정부는 인식해야 한다.
노사정 대타협의 모범으로 칭송하는 1938년 스웨덴 샬트세바덴 대타협을 이끈 한손 총리는 “국가는 인민의 가정”이라는 유명한 언명으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결과 출산과 육아, 교육과 의료를 국가가 책임지는 보편적 복지정책 실현은 노사 대타협의 출발점이 됐다. 노동자들은 기업에서 퇴출되더라도 국가가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었고, 기업은 어차피 부담해야 할 기업 복지를 세금으로 납부한다면 기업별 노사관계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전환을 한 결과이다. 2013년 자유당 출신으로 보수당 연정의 재무장관을 지낸 안데르스 보리는 재임기간 1년 반 동안 노사정이 350번 만난 것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스웨덴 모델의 기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김영훈 / 전 민주노총 위원장
2015.4.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