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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더빌 여행기: 세계의 지리를 뒤흔든 중세 여행기』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이해하려는…
-『맨더빌 여행기: 세계의 지리를 뒤흔든 중세 여행기』

 

 

mandeville『맨더빌 여행기』(The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한국어판 주나미 옮김, 오롯 2014)는 여행기지만 여행기가 아니다. 이 책은 “존 맨더빌이라는 남자가 1322년부터 1356년까지 바다 너머 경이롭고 신비로운 나라들을 여행하고” 남긴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다. 필사본으로 전해져오던 이 책은 인쇄술의 등장 이후 “성서와 더불어 가장 활발히 인쇄되었”다고 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콜럼버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414~15면). 그러나 후대 문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이것이 ‘존 맨더빌 경’이 ‘여행’을 하고 쓴 책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맨더빌이 실존했던 인물인지도 확실치 않을뿐더러, 후대 문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다른 여행기나 지리지에서 따온 것이다. 즉 맨더빌의 여행기는 머나먼 신비한 이국의 땅과 바다가 아니라 도서관의 책상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에게는 바로 그 점이 매력이다.

 

이 책은 순전히 밈(meme,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을 재료 삼아 태어난 새로운 밈이다. 당시 유럽의 지식사회에 어떤 밈들이 살아 움직이고 돌아다니며 이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고 있었는지, 그리고 항해와 교역을 통해 얻은 새로운 지리적 지식이 독자들에게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퍼져나가고 있었는지, 이 책을 보면 먼 훗날의 사람들도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스스로 새로운 밈이 되어 증식하고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당대와 가까운 후대의 사람들은 『맨더빌 여행기』를 읽고 먼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그곳에 가려는 욕구를 키웠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밈은 진(gene), 즉 유전자에 빗대 만든 낱말이다. 유전자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증식하면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변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진화도 없을 것이다. 복제과정에서 빚어지는 오류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또한 새로운 다양성을 낳고 낮은 확률로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밈도 마찬가지다. 필경사의 손에서든 독자의 머릿속에서든, 밈이 언제나 착오 없이 복제된다면 글월은 정확하게 계승되겠지만 새로운 생각이 나타날 여지는 줄어들고 세상은 훨씬 재미없어질 것이다. 복제과정에서의 변이는 역사가나 문헌학자에게는 ‘오류’로 보이겠지만 글이나 생각이 진화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변이야말로 밈의 생태계를 풍성하게 하고 새로운 창조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복제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하다. 이에 비해 전근대의 글월은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전하는 것이었으므로 복제과정에서 수많은 의식적·무의식적 변이를 낳았다. 더욱이 중세와 르네상스는 이미 의미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세계였으므로 그 시대의 글월들은 여러 층위에서 뒤엉키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밈들로 가득 차 있다. 『맨더빌 여행기』에도 멀쩡한 밈, 괴이한 밈, 잘못된 밈, 봐줄 만한 밈들이 뒤섞여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분류는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 따른 것이고, 당대의 사람들은 이에 얽매이지 않고 이 책을 통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혼돈 속에서 새로운 생각과 모험적 시도가 태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마냥 기이한 이야기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할 수 없는 기담의 묶음에 머물렀다면 새로운 밈의 지위를 얻을 수도 없었을 터이다. 중세 말엽이면 유럽 주변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지구와 우주에 대해 이전 시대보다는 훨씬 많은 지식이 쌓인 때다. 『맨더빌 여행기』도 그런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항해술의 발달을 시사하는 기술도 자주 등장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이 큰 논란거리도 못 된다는 듯 수시로 언급되곤 한다. 유럽인들 마음속의 지리적 경계도 이전 시기에 비해서는 확장되었다. 2부에서 다루는 “성지 너머의 세계”가 확인할 수 없는 기담들로 점철되어 있는 데 비해, 1부 “성지로 가는 길”의 중근동 지역에 대한 서술은 지금 보아도 사실적이고 균형이 잡혀 있다. 이는 맨더빌(그가 실존했건 어쨌건)이 살았던 세계의 경계가 대략 중근동까지였음을 뜻한다. 중근동을 넘어선 세계에 대해서는 급격하게 허황된 이야기가 늘어나 믿을 만한 이야기와 뒤범벅된다. 에티오피아에 다리가 하나인 종족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인도 사람들은 소를 숭배한다는 이야기가 섞여 있을 때, 당시의 독자들이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유럽에만 갇혀 있었던 유럽인들의 정신이 껍질을 깨고 나오기는 했지만, 맨더빌의 시대까지도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국 등은 교통할 수 있는 실재하는 세계라기보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족한 비현실적인 세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교통이 발달하지 않고 지식의 유통이 제한되었던 과거에만 필요했던 양식일까? 더이상 ‘미지의 땅’이란 없는 것 같은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여행기는 무지했던 과거의 화석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리적인 미지의 땅은 사라졌지만, 지적인 미지의 땅은 오히려 나날이 무서운 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특히 과학, 기술, 의학이라는 앎의 신대륙은 이제 단순히 그 넓이만 비교한다면 앎의 구대륙을 압도하고 있다. 이 넓은 신대륙에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정보가 쌓이고 있으니 거기에 처음 들어간 사람은 무엇을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할지도 쉽게 알 수가 없다. 현대의 여행기는 이 새로운 탐험을 위해 필요하다. 과학, 기술, 의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전문 연구자들 말고도, 후방에서 이 신대륙에 처음 당도한 이들을 위해 이 미지의 땅이 어떤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또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 것인지 개략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들이 있다. 이와 같은 대중과학서들이 바로 현대의 지적 탐험을 인도하는 여행기다. “누구나 다 그 신대륙에 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는 불만 섞인 반문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영화 「인터스텔라」(2014)의 인기를 떠올려보면, 쉽게 갈 수만 있다면 거기에 가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사실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옛날에 맨더빌이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노력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과학자들이 자연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노력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 여정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또는 지식의 층위 면에서 워낙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므로 늘 어렵고 힘들다. 따라서 지적인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는 늘 먼저 다녀온 이들의 여행기가 길잡이로서 필요하다. 『맨더빌 여행기』의 옮긴이는 여러 판본을 대조하고 꼼꼼한 역주와 해설을 붙임으로써, 이 책을 단순한 역서가 아니라 『맨더빌 여행기』의 세계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여행기로 만들어냈다. 그뿐 아니라 과학저술가들도 광활한 과학의 세계를 헤매지 않고 둘러볼 수 있도록, 그래서 결국은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중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새로운 여행기를 내놓고 있다. 이들 여행기를 옆에 끼고,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맨더빌을 따라서, 각자의 미지의 땅을 향해 배에 오른다. 이 여정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고, 여행기도 따라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5.4.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