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펠레 포르셰드 『우리 부모님』

노년에 대한 불안과 능률사회의 죄의식

-펠레 포르셰드 『우리 부모님』

 

 

fwf노인 돌봄, 복지국가 스웨덴의 이야기

 

『우리 부모님』(De Anhöriga: Åtta Tecknade Noveller, 2012, 한국어판 강미란 옮김, 우리나비 2014). 제목만으로는 가정의 달 5월에 아주 잘 맞는 따뜻한 책으로 보일 수도 있을 이 책은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의 작가 펠레 포르셰드가 간호조무사로서 가정방문 돌봄 서비스를 했던 경험을 담은 그래픽 노블의 번역본이다. 여덟개의 짧은 이야기로 짜인 이 책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만화책임이 틀림없지만, 좋은 만화책들이 종종 그렇듯이 글자로만 전달하려면 어려웠을 삶의 진실을 그림과 함께 간결하면서도 깊이있게 전한다. 주인공인 돌봄도우미 펠레는 각각의 이야기를 느슨하게 연결해주는 매개 역할을 할 뿐 각 장은 돌봄의 대상이 되는 노인의 자식이나 손자의 시각에서, 혹은 다른 도우미나 노인 자신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이러한 장치는 작가가 직업윤리 때문에 자신이 돌보았던 사람들의 사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임종에 가까운 노인들을 돌보는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 부모님』이 눈길을 끈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스웨덴에 관한 이야기, 그것도 돌봄 서비스를 실제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이야말로 복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한국사회가 본받아야 할, 그러나 실제로는 따라가기 어려운 모범국가로 거론이 되니, 만화에 담겨 있을 솔직하고도 소소한 뒷이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복지라는 게 제도를 이식하거나 배워온다고 될 일이 아니건만, 늘상 다른 나라에서는 이렇게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부지런히 수출해서 경제를 따라잡자고 하던 말과 내용만 다르지 곡조는 비슷한 ‘선진국’ 타령에 대한 어깃장 때문에 관심이 간 것 같기도 하다. 

 

복지의 이상과 현실

 

책의 내용은 매우 낯설기도 하고, 동시에 매우 낯익기도 했다. 우선 펠레가 돌보던 구넬 할머니의 죽음을 그리는, ‘가족’이라는 부제의 첫번째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끔씩 찾아오는 할머니의 자녀들이 시간에 쫓기는 돌봄도우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이다. 자녀들은 노인의 상태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로 노인의 상태를 악화시키기도 하고, 실제 노인이 건강하길 바라는지 아니면 어서 돌아가시길 바라는지조차 모호한 입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노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으레 도우미와 서비스업체를 탓한다. 구넬 할머니의 사례를 언론에서 다루게 되고, 할머니가 사람들의 예상보다 일찍 돌아가시게 되자 딸은 서비스 질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도우미를 다시 문제 삼는다. 도우미는 이전부터 할머니의 약을 없앤 장본인으로 아들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몰래 달아두었던 감시카메라를 보면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 할머니가 스스로 약을 모아두었다가 한번에 먹은 것으로 나오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또 확실치 않아 보인다. 펠레는 펠레대로 시간에 쫓겨 할머니가 낮잠 자는 시간에는 근무를 빼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노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다음 근무에 늦을 수밖에 없으며, 근무 중에 다른 노인을 걱정하기도 하고, 또 해결하기 복잡한 문제에는 애써 눈을 감기도 한다. 가족들은 임종이 가까운 노인을 돌보는 도우미가 자주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서 낯익은 것은 노인을 둘러싼 사람들의 복잡한 감정이고, 반대로 한국과 가장 다른 것은 개인의 자립생활을 국가가 지원한다는 사회적 이상이 어쨌든 실현되고 있어서 한국 상황이라면 불거졌을 개인의 지불능력 문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스웨덴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노인 돌봄의 모범사례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회적 제도를 갖춘다고 해도 노년의 문제는 남는다는 것과, 그러므로 고령화사회에서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복지에서 사회적 연대의 정신이 살아 있고, 사회적 돌봄을 오랜 기간 시행해온 스웨덴에서도 결국 늘어나는 복지수요는 민영화 바람을 불러왔다. 효율과 능률, 질 관리, 경쟁, 선택 같은 언어들이 사회적 논의를 지배하고 있지만, 이미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문제다. 시간에 쫓기는 도우미 입장에서도 효율의 증대가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리라는 뉴스는 분노를 느끼게 할 뿐이다.

 

스웨덴의 복지현실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구넬 할머니는 먹던 음식을 토해낸다. 물론 이는 냉장고 속에서 이틀 묵은 만두 때문으로 나오지만, 그럼에도 정신없이 바쁜 도우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 입장에서나, 음식을 토한 할머니를 씻겨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음 노인을 돌보러 가야 하는 도우미 입장에서는 모두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그 가운데 계속 도우미와 마찰을 빚다가 결국 서비스를 끊은 노인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면서, 자신 말고는 들여다볼 사람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끝내 그 노인을 찾아가고, 실제로 엉망이 되어 있는 노인의 생활을 수습하는 펠레의 이야기는 돌봄 서비스를 효율성과 고객 만족도로만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불안을 넘어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만들 것인가

 

사실 스웨덴 복지의 어떤 문제를 이야기하든 간에 한국사회에서는 부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가족 내 돌봄이 당연시되던 과거에는 노인들이 사회적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요양병원이 점점 늘어나고 가족 내에서 돌봄을 해결하기가 어려워진 현실에서는 시민 모두에게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웨덴 사례가 ‘선진국’의 현실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 스웨덴을 비롯한 복지국가들이 고민하고 시행해온 가족친화적 일자리, 자립생활, 일과 가정의 양립, 사회적 돌봄에 대해서는 배우고 또 배울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스웨덴 같은 사례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라는 점이다. 『우리 부모 님』이 뛰어난 점은 효율이나 선택, 자립, 인간의 존엄성 등 복지와 관련해 등장하는 용어들이 일상 속에서 만들어내는 긴장을 매우 실감있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스웨덴만큼 주어진다고 해도 가족들에게는 죄책감이 남고, 자립적인 생활 뒤에는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효율을 따지지 않으면 노인인구가 점차 늘어가는 사회에서 전체 복지비용이 늘어가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능률과 비용을 앞세운 사회에서 존엄하게 죽는 것은 어려운 숙제가 된다. 만화에 나오는 노인의 자녀들 역시 젊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느끼는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부모가 재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노인들로 인한 부담 없이 삶을 즐길 시간이라도 남겨주고 떠나길 바라게 만든다. 

 

여기서 이 책의 원제인 ‘De anhörige’의 우리말 번역이 ‘가족들’, 더 정확하게는 ‘친척들’에 가깝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말 제목인 『우리 부모님』의 의미는 잘 와닿지 않는다. 단지 부모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노인을 돌보자거나, 돌봄의 대상이 된 노인들의 입장에서 서비스를 보자거나 하는 이야기로 느껴지는 제목인데, 이 책의 장점은 정책이나 미디어에서 즐겨 쓰는 추상적인 용어나 아름다운 도덕용어들을 일상의 차원으로 확 끌어내려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제가 가족이라고 했지만, 그 의도가 생물학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음도 분명하다. 이 책이 던져주는 근본적인 질문들은, 사회적으로 돌봄 문제를 해결해도 여전히 남는 가족의 문제는 무엇인지, 서비스의 차원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돌봄의 영역은 무엇인지, 홀로 살아갈 수만은 없는 인간들이 서로 맺어야 할 관계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결국 가족이란, 인간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인간을 만나게 되는 기본 틀일 뿐이다. 당연하게도 가족이 인간관계의 전부는 아니며, 가족 외에도 내가 살아가며 돌봐야 할 사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사실 인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2015.5.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