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김형률 유고집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불꽃같이 살다 간 숭고한 사람
-김형률 유고집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banhaek김형률(1970~2005).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나는 그를 몰랐다. 2년 전인가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가졌던 탈핵행사에서 그의 부친을 뵐 기회가 있었고 그가 반핵(反核)인권운동가였다는 정도만 알았다. 그런데 올해 5월 23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김형률 10주기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토요일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시민행진’을 진행해온 나는 이날 부산역에서 민주공원까지 시민행진을 한 뒤 추모제에 처음 참석해 김형률 선생을 느끼게 됐다. 그날 추모식장에서 이 책을 구입했고, 점심시간에 엮은이 아오야기 준이찌(青柳純一) 선생을 만났다. 그뒤 이 책 서평을 쓰는 기회를 갖게 됐다.

 

‘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고(故) 김형률 유고집’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행복한책읽기 2015)를 읽고 나서 그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대학 시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의 감동, 충격과 같았다. 김형률은 ‘불꽃같이’ 서른다섯해를 살다 갔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 2세로 병마 속에서도 원폭2세 환우들의 인권을 옹호하며 이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목숨을 건 사람. 이 책은 김형률의 일기·수첩과 공적인 발언 및 기록을 아오야기 준이찌 코리아문고 공동대표가 엮은 것이다. 김형률 선생이 목숨을 걸었던 ‘반핵인권’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남겨진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반핵인권 복음서’이다.

 

고 김형률, 우리가 그를 만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엮은이는 김형률을 “추모하고, 기억하고”, 김형률이 “남기고 외친” 것을 발굴·기록하고, “우리가 김형률이 되어야 하고, 다시 김형률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적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만남과 기억, 그리고 기록’이라고 할 것이다. 김형률 선생 10주기가 됐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원폭2세 환우 문제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미약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반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가의 무관심과 직무유기 탓이 크다. 김형률은 피해자이자 환자인 자신의 고통을 뛰어넘어 스스로 반핵평화운동가이자 사상가로 거듭났다.

 

1부 ‘김형률을 기억하다’에서 엮은이는 ‘김형률의 삶과 꿈’을 재조명한다. 감기에 한번 걸리면 한달 간 결석을 해야 했던 아픈 몸을 견디며 자라 야학에 다니고,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의 마음을 지녔던 김형률은 “일상생활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그는 1995년 25세 때 비로소 자신의 병이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으로, 히로시마 피폭자였던 모친과 연관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2002년 3월 코이즈미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원폭2세’임을 밝히고,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결성한다. 고통을 자책하지 않고,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스스로를 내놓은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그를 믿어주는 부모님의 든든한 가족애, 특히 아버지의 힘이었다. 김형률은 연대와 소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소통을 꾀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좌우명도 이때 나왔다.

 

2부 ‘김형률이 남기다’를 통해서는 그의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는 2003년 일기에 “내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 목숨을 담보해야만 겨우 관심있게 지켜볼 수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2004년 8월 어느날엔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보통 사람에게는 단순한 소망이 내게는 너무 힘든 것이 되었다. (…) 이것은 한 원폭2세 환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2300여명의 한국 원폭2세 환우들의 삶의 모습일 것”이라며 인식의 지평을 자신에서 ‘원폭2세 환우 문제’로 넓히고 이를 ‘인권 문제’로 재인식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고 있었다.

 

3부 ‘김형률이 외치다’에서 김형률은 “원폭2세 피해자들에게도 인권은 있습니다”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 환우들의 건강권과 생존권을 요구합니다”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을 요청합니다” “원폭2세 문제는 반핵과 탈핵을 넘어 인권의 문제입니다”라며 기자회견, 진정서, 정책 요구서, 청원서 등을 통해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그는 한국·일본·미국 정부가 배상은커녕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무차별적 원폭 투하가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행위라며 미국의 책임을 제기한다. 그리고 국가 부작위의 책임을 내세우면서 ‘한국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김형률특별법)’ 제정 청원을 전개한다. 그의 철저함은 청원 제목이 국회 사무처에서 일방적으로 수정된 데 반론을 제기해 바로잡은 데서도 나타난다. 이렇듯 김형률은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다 2005년 5월 29일 건강악화로 숨을 거둔다.

 

4부 ‘김형률은 이어진다’에서 김형률의 아버지 김봉대씨는 아들의 뜻을 이어 “한·미·일 정부는 원폭2세 환우들에 대한 ‘선지원 후규명’으로 그들의 생존권과 생명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하고, 자신이 “이 땅의 모든 2세 환우들의 아버지가 될 것”임을 밝힌다. 김봉대씨의 모습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종기씨의 모습이 겹친다. 그렇게 2006년 4월 ‘김형률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그해 5월 ‘한국 원폭2세 피해자 김형률 추모사업회’가 발족됐다.

 

이러한 김형률의 메시지는 2011년 후꾸시마원전사고 이후 새로운 의미를 주고 있다.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는 이 책 속의 「원폭의 기억과 평화교육」이란 글을 통해 김형률의 인권중심적 반핵평화운동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지배권력화된 과학기술로부터 인간의 보편적인 건강권과 생명권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식이야말로 새로운 반핵, 탈핵운동의 바탕”이다. 즉 원폭 피해를 넘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핵발전소의 허구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핵발전소 주변 주민의 갑상선암 공동소송, ‘균도소송’으로 잘 알려진 ‘균도아빠’ 이진섭씨의 투쟁과도 연결된다.

 

배제된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시민단체의 연대와 민주정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나마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이들 원폭2세 환우에 대한 관심이 여느 정부에 비해 나았다고 엮은이 아오야기는 평가한다.

 

김형률과 아오야기의 만남과 공감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만 귀를 귀울일까 말까 한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피해자인 소수자에 대해 무관심하고 방관하는 자는 부지불식 중에 가해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다시 김형률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을,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성소수자들을 만나야 한다.

 

지난 6월 지역의 범시민운동에 힘입어 고리1호기 영구 정지 결정이 났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미완의 김형률특별법 제정을 위해 우리 모두가 김형률이 남긴 짐 중 가벼운 것 하나씩은 나눠 져야 할 것 같다.

 

 

김해창 /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공동집행위원장

2015.7.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