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마이클 돕스 소설 『하우스 오브 카드』
우리는 종이 한장일 뿐인가
-마이클 돕스 소설 『하우스 오브 카드』
선거운동에 두번 참여해봤다. 한번은 주황색 점퍼를 입고 덩치 큰 선배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다니면서 피켓을 흔들거나 율동을 했다. 또 한번은 후보자와 동행하며 사진을 찍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를 알리는 글을 썼다. 후보자가 당선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했고, 밤이 되어 몸이 지치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은 날이 반복되었다. 첫번째 선거운동에선 후보자가 낙선했으나 당은 선전을 해서 국회에 10석을 얻었다. 두번째 선거운동 때는 늦게까지 당선자가 가려지지 않아 새벽이 되어서야 당선을 확인하고 기뻐했다. 두번 모두 자원봉사였다. 다시는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고, 기껏해야 자원봉사로 일해놓고는 승리에 도취되었던 건 몹시 후회한다. 그들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보통 ‘정치’라고 하면 시민이나 국민 같은 단어가 먼저 거론되어야 마땅한데 선거판에서는 지지층이나 유동층 따위의 단어가 쓰인다. 지지층을 결속시키고 유동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약과 홍보문구가 작성된다. 영국의 정치인 겸 작가 마이클 돕스(Michael Dobbs)의 장편소설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한국어판 김시현 옮김, 푸른숲 2015)의 주인공인 보수당 원내총무 프랜시스 이완 어카트에 의하면, “여론조사에서 쓰는 전문용어에 따르면 A와 B 사회계급이 살고” 있다. “여권이 항상 구비되어 있고, 집 앞 진입로에 레인지로버 같은 고급 SUV”가 세워져 있는 “이런 지역에서는 선거유세를 하는 것이 천박하다고 간주”되고, “이곳에서는 표를 세지 않는다. 무게를 달지.” 유권자가 고심 끝에 투표를 하든, 그 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항변하며 정치인에게 공약 이행의 의무를 강요하든 수많은 정치인에게 한 사람의 삶은 몇 그램의 종이 한장일 뿐이다.
그들에게 정의감이나 사명감은 없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원작소설이다. 무려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으로 나오고, 오바마와 시 진핑이 극찬을 한 드라마와 원작소설은 많은 면에서 다르다. 배경, 등장인물, 스토리가 다른데 드라마에 재미를 느껴서 소설을 읽고자 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당의 원내총무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자 온갖 음모와 술수로 적을 제거해 나가고 야망을 드러내는 설정은 같으니, 소설에서도 드라마 못지않은 스릴과 소설적 재미를 만끽할 수는 있다.
예순을 넘긴 주인공 어카트는 “국회의원이자 추밀고문관이자 내각 각료이자 대영제국훈장 수훈자”지만 당의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원내총무가 원래 그런 자리다. “대중연설이나 텔레비전 인터뷰 없이 눈에 띄지 않게 고생스러운 일만 도맡아 하는 얼굴 없는 직책이었다.” 동시에 그는 “당규 책임자였다. 당이 정한 노선으로 의원들을 몰아가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만드는 집행자였다.” 그는 당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의원이 누구와 손을 잡았고, 누구와 잠을 자고, 국회에 참석할 만큼 멀쩡한 정신인지, 뒷돈을 슬그머니 챙긴 것은 아닌지” 알아야 하고, 이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묵묵하게 당을 위해 일하던 그가 야욕을 드러낸 건, 선거에서 당이 승리를 거두고 시행한 내각 개편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다.
“2차대전 후 그 어떤 당도 우리처럼 오래 집권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새로운 도전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죠. 국민들은 우리에게 지루함을 느낍니다. 따라서 신선한 이미지로 바꿔나갈 필요 있죠. 국민들이 식상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68면)
그의 말에도 총리와 당은 반응이 없었다. 마침내 어카트는 움직인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온갖 비밀을 이용하여 무능해 보이는 총리와 너구리 같은 당내 적과 맞선다. 결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카트가 총리 자리에 오르든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되든 “거의 모든 총리가 난도질당하거나 토막나거나 피투성이로 내쫓겼다. 여당 의원의 절반 이상이 자기가 총리라면 훨씬 잘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총리를 끌어내리는 건 결국 시민이 아닌 정치인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감이나 사명감 따위는 없다.
이 소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 혹은 정치에 대한 문학적인 대답을 기대 마시라. 이 소설이 주는 재미는 정치의 민낯과 정계 안 권력다툼의 모습, 그리고 어카트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잡아가는지에 있다. 정치 스릴러 소설로 읽는다면 짜릿한 재미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작가 마이클 돕스는 새처(M. Thatcher) 정부에서 핵심 참모로 활약하다가 한순간에 권력의 자리에서 비참하게 밀려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험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날들
박근혜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가 당으로부터 버림받아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난 유승민 의원을 떠올려보자.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정치 아이큐가 결코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정치인들이 국정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더 소름끼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원내대표 자리를 잃은 유승민 의원의 지지율은 오르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더욱 떨어졌다니 『하우스 오브 카드』의 배신과 음모가 우리 현실과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매일 정치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공약을 파기함으로써 야당 의원들로부터 궁지에 몰린 총리는 말한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치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우리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대꾸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단지 몇 그램의 표 한장일 뿐일까.
『하우스 오브 카드』는 시리즈라고 한다. 정치의 민낯을 까발리는 이 시리즈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나는 다음 편도 읽을 것이고, 그것을 읽으며 또 한번 이 나라의 현실정치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슬프게도.
“‘politics(정치)’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poly’와 ‘ticks’에서 비롯되었네. 전자는 ‘많은’을 의미하고, 후자는 ‘피를 빨아먹는 자그마한 벌레’를 의미하지.”(225면)
백상웅 / 시인
2015.7.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