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록페스티벌, 아름다운 축제의 경험
1999년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본격화한 한국의 여름 록페스티벌 시즌은 이제 10년을 훌쩍 넘어 20년을 향해 가고 있다. 그사이 다양한 형태의 록페스티벌이 생겨났다. 한두번을 끝으로 조용히 사라진 경우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그 수는 늘어났고, 개최되는 지역과 성격은 다양해졌다. 올여름의 경우, 7월부터 대형 록페스티벌들이 서로의 일정을 피해 거의 매주 열리는 가운데, 같은 주말에 두개의 행사가 눈에 띌 정도로 록페스티벌은 넘쳐난다. 록페스티벌은 왜 이렇게 많을까?
록페스티벌은 축제다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축제가 개인들로 하여금 일상적 시간과 세속적 가치로부터 단절되어 온전히 자유롭고 평등해지는 경험을 하게 했고,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차원에까지 유익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록페스티벌에서 느꼈던 감정적 쾌는, 록음악을 현장에서 직접 감상하는 감동을 넘어, 축제의 이런 기능과 닿아 있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수많은 축제들 중 이러한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 지역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특산물축제나 비슷한 콘텐츠들을 모아놓은 예술제 형식의 축제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름 주말을 가득 채운 록페스티벌의 개수는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름 록페스티벌 시즌의 역사가 이어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201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록페스티벌을 경험했다. 뮤지션으로서 무대에 섰고, 관객으로서 페스티벌을 즐겼다. 푸른 산과 들이 둘러싼 넓은 초원에 세워진 무대 위에서 나의 목소리와 악기 소리가 퍼져 나가고, 다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그때의 느낌은 정말 짜릿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관객으로서 이미 진흙탕이 되어버린 잔디밭에서 공연을 즐겼던 순간이다. 땀과 진흙으로 엉망이 된 관객들은 이미 육체적인 불쾌함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저마다 무대 위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맞춰, 흥겨워진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 빈손으로 ‘에어기타’를 연주하며 ‘헤드뱅잉’을 하는 사람, 제자리에서 그저 높이 뛰며 온몸을 흔드는 사람, 기차놀이를 하며 관람장 사이를 오가는 사람,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사람 등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무언가로부터 아주 자유로운 상태였다는 것은 공통적이었다. 아주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그날 이후 내게 록페스티벌은 여름이 되면 꼭 가야 하는 성지가 되었다.
더 아름다운 축제를 위하여
이안 감독의 2009년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은 지금 모든 록페스티벌의 모태가 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1969년, 페스티벌이 개최될 미국 뉴욕주의 시골 마을은 50만명의 군중이 닥치자 버텨내지 못하고, 당국에 의해 재난지역으로 선포된다. 대부분의 관중들은 노숙을 하고 강과 들판에서 최소한의 위생을 해결하며 사흘을 버텨낸다. 페스티벌이 끝나자 온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복구는 막막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 자유, 평화가 가득했던 며칠간의 페스티벌이 그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값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될 거라고.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도 사람들이 여전히 록페스티벌을 즐기는 이유가 잘 담긴 영화다.
그런데 세월이 지났음에도 50년 전의 불편함이 여전하다는 것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하나의 록페스티벌이 끝나고 나면 SNS는 온갖 불만과 비판으로 가득하다. 언제나 진흙탕으로 변하고 마는 잔디밭, 관객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화장실과 편의시설, 가격에 비해 형편없는 음식, 페스티벌 특수를 통해 폭리를 취하는 숙박과 교통 등. 같은 불만과 비판들이 매년 되풀이된다. 축제에 찬물을 끼얹는 운영의 미숙함도 적지 않다. 최근 어느 페스티벌에서 벌어진 경호요원의 폭력사건은 좋은 예다. ‘바디서핑’은 흥에 겨운 관중들이 한 사람을 들어올려 서핑을 하듯 이리저리 옮기는 퍼포먼스로서, 록페스티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안전을 이유로 자제를 요청할 수는 있으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됐다. 폭행을 당한 관객과 뮤지션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 정신적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축제의 자유로움에 흠뻑 젖은 이들에게 난데없이 강제와 폭력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높은 개런티의 유명뮤지션이 가득한 라인업은 관객을 록페스티벌로 이끌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훌륭한 ‘축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축제’로서의 록페스티벌은 뮤지션의 음악에 맞춰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또는 페스티벌장을 오가며 자유를 만끽하는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 이 모든 사람들의 카타르시스의 총량이 록페스티벌의 진정한 매출이라 생각한다. 록페스티벌의 더 아름답고 오랜 역사를 위해, 각 진행 주체들이 이같은 진정한 ‘축제’로서의 경험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록페스티벌을 즐기는 관객과의 공감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록페스티벌에 끼어드는 당연한 불협화음 같은 문제들의 해결책은 물론, 더 아름다운 ‘축제’를 만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성도 / 뮤지션
2015.8.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