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비정규직 철폐’는 대안이 아니다
박홍주 | 서강대 여성학 강사
2006년 11월 30일, 불과 16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비정규직 관련법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격렬한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법안의 통과에 의의를 두는 쪽은 노사정위원회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뿐이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시민사회·노동단체는 이 법안이 비정규직 보호가 아니라 양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법안 철폐를 위한 총력투쟁을 선언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비정규직 자체의 완전 철폐를 위한 투쟁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비정규직 철폐'라는 원론적이고 선언적인 투쟁만으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비정규직화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기업이 이윤획득을 위해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원하는 노동자에게도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한 측면이 존재한다. 실제로 모든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일하는 나라는 지구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비정규직 그 자체가 문제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관련 법안이 표류하던 지난 1년간 비정규직 노동자가 30만명이나 늘어날 정도로 그 규모가 급속하게 커지고 있으며,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이 날로 심화되면서 새로운 신분제도로 고착화된다는 점이다. 지난 9월에는 공공부문에서조차 주변업무를 외주화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 공표되었는데, 이는 한국 비정규직 노동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대표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이 '사유 제한 없는' 비정규직 사용과 '2년 후 정규직화'라는 기간 제한에 합의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수많은 시민사회·노동단체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으며, 특히 비정규직의 70%를 차지하는 여성계는 더욱 완강히 반대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을 날치기 당했다"며 견고한 노동시장 차별에는 손을 못 대는 무디고 형식적인 '차별 금지' 규정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여성노동계는 외주화의 확산이라는 악영향을 최소화할 방안을 모색하면서 '2단계 보호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현실화를 주장한다.
종래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에서 한발 더 나아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업무 내용이 다르더라도 직무평가를 통해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comparable worth)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현행 비정규직법은 '동일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노동현실에서 직무·직종이 성별에 의해 분리되는 경우가 많고, 기업 규모에 따라 임금 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법안은 애초부터 정규직 업무와 파견직·계약직 등의 비정규직 업무가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차별을 주장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2년 내에서 언제든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고 또 손쉽게 해고할 수 있다. 게다가 KTX 승무원의 사례에서 보듯, 주로 여성들이 맡는 일을 '주변업무'로 간주하여 외주화하고, 남성들의 업무를 '핵심업무'로 규정해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등 성차별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여성과 남성의 노동을 분리하고 성차별적 통념에 의거해 여성의 일을 평가절하하는 우리 사회에서, 동일한 업무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따라서 여성 노동의 가치를 남녀고용평등법에서 명시하듯이 '객관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은 표준체계와 가치척도'로 평가할 수 있는 씨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관련법안 제정 등 강제적인 방안 마련에 치중할 뿐, 동일노동과 동일가치노동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실질적 기준이나 방법, 그리고 이를 전담할 전문인력 확보에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설령 당장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반영하여 비정규직 법안을 개정한다 해도 이를 현실적으로 집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평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쪽도 적지 않은 형국이다.
캐나다에서는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직업별로 세분화된 직급·직종 체계를 갖추고 직급이 같은 계약직과 정규직에게는 동등한 임금수준을 보장한다. 휴가나 연금 등의 복리후생에서 차이가 나지만, 임금만을 놓고 본다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의 임금이 조금 높은 편이다. 유급휴가가 제약된 계약직의 현실을 감안해서 정규직의 한달 3일의 병가에 맞먹는 임금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일한 일을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동등'할 수 있는 것은 캐나다 정부가 10년 동안 직무평가와 이에 기반한 표준임금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덕분이다. 또한 이를 토대로 '능력주의'에 입각해 여성과 소수자의 평등한 노동권을 보장하는 '적극적 조치'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비정규직 철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대안적 원칙을 확인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2006.12.19 ⓒ 박홍주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