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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다

조광희 / 영화제작자


신문을 읽다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주제로 한 칼럼들을 1년에 평균 3번 정도는 접하게 된다. 이 표현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에게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 예로는 각종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숨진 귀족이나 고위층 자제들의 이야기가 단골 메뉴처럼 거론된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신입생 설명회 때였다. 어느 교수님이 칠판에 처음 보는 알파벳을 적으면서 "여러분들은 사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니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교수님이 전수해준 그 말은 이상에 가득 찬 어린 학생들에게 각별한 감정을 자아냈다. 나 또한 그것을 자긍심과 책임감이 뒤섞인 묘한 느낌으로 받아들였는데, 생각해보면 자극받은 선민의식 때문에 상기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숭고함으로 포장된 그 감정에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딘지 석연찮은 선민의식, 그 속에 숨은 욕망과 권력

그후 나름대로 세파를 겪으면서 그 표현에 내포된 불순한 점에 대하여 좀더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표현은 내게 대학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언론 인터뷰에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법무부장관이 '불법시위나 파업을 엄단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수사로 여겨진다.


물론 나는 이 표현의 의미를 진실하게 체현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많은 고결한 인물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예외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레토릭의 이면에는 집요하고 끈질긴 사회적 욕망과 권력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이 표현의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일본의 비평가로서 사상가의 반열에 근접한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주장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근대국가를 '자본=국가=네이션'라는 삼위일체의 공식에 의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그의 논지는 자본, 국가, 네이션의 삼위일체가 완성됨으로써 근대국가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네이션'은 특히 감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월드컵 경기에서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놀라운 열기를 보라. 그 열정은 그들이 속해 있는 네이션, 즉 국민국가에 대한 공통의 소속감에 의하여 분출되고 있다. 깊이 성찰해보면 그러한 태도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집요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비논리적이라는 지적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근대국가와 신분제 떠받치는 '교환의 양식'

한편 자본뿐만 아니라 국가나 네이션도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코오진은 이 세가지를 '교환의 양식'에 의하여 구별하고 있다. 즉 자본제가 '상품의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면 국가는 '일방적 취득과 재분배라는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고 네이션은 '호수적(互酬的, 호혜적)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일상생활에서는 듣기 어려운 '호수적 교환'이라는 표현은 예를 들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 부모가 아이를 댓가 없이 양육하는 것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세가지 교환양식은 근대국가에서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된다. 가령, 각자가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한 결과가 경제적인 불평등과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된다면, 국민의 상호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그것을 완화하고, 국가가 자본의 방종을 규제하며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근대국가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코오진이 말한 호수적 교환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사회에서 지배하는 자가 지배되는 자로부터 복종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하여 모범을 보이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갸륵한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생각하면 결국 신분질서를 공고히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배자가 복종의 동의를 얻는 수단

어느 불평등한 사회든 지배하는 자가 힘으로만 씨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버겁다. 이때 소수의 지배하는 자가 다수의 지배되는 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그 지배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강자이기 때문에 지배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하다. 그것은 지배되는 자가 힘이 더 세지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좋은 방법은 지배하는 자가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것만큼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노예제 사회도 아니고 봉건제 사회도 아니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 민주공화국에서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소환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사회가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 수준에서는 여전히 신분사회이며, 그 부당성과 불안정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보완되어야 제대로 작동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반드시 물어보아야 한다. 혹시 고귀한 신분을 아예 포기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기꺼이 우리와 같아질 용의가 있느냐고.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우리를 위해 헌신할 수는 있지만, 우리와 같아질 생각은 없다면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차원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과 기제가 수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이른바 '고귀한 신분'을 가지신 분들이 얼마나 자기희생을 하는지, 얼마나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시비를 거는 내 자신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대통령께서 재산을 헌납했지만 천하를 얻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뒷마무리하는 것일 뿐이고, 어느 재벌의 사회공헌 약속은 형벌을 적게 받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하여 작은 것을 내놓아 마침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얻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거나 임명될 뻔했던 사람들의 투기와 범법으로 점철된 삶의 궤적을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저잣거리의 평범한 이들보다 낫기는커녕 일신을 위하여 각종 편법을 실천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승리한 맹수이자 생존의 명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들의 천국에 사는 그들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불평등한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궁여지책일 뿐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여우의 지혜조차 없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배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천만다행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신분질서 속에서 그저 강자일 뿐인 그들을 존경까지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반대로 이 사회가 결국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희망에 찬 전망으로 이어진다.


공화국 시민의 의무와 법이나 잘 지켜라

대한민국은 누가 무어라든 민주공화국이다. 만일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 반드시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별로 그럴 생각도 없는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간청하지 말자. 그들은 그런 수준이 못된다. 대신에 그들에게 누구나 지키는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의무나 제대로 하라고 말하자. 법이나 제대로 지키라고 요구하자. 살기 위해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방패로 내리찍지 말라고 외치자. 그리고 자원과 기회와 미디어를 독점하지 못하게 저항하자.

그러고 나서도 당신에게 마음의 여력이 있다면, 공화국 시민의 법과 의무도 준수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저들을 차라리 불쌍하게 여기자.


2009.8.12 ⓒ 조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