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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폭스 켈러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

gheweg인간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질문을 찾아서

- 이블린 폭스 켈러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


경제사학자 클락(G. Clark)은 2007년 그의 논쟁적인 책 『자선에 작별을 고하며』(A Farewell to Alms)에서 영국이 산업혁명기를 거치며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가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유전자와 자본주의 부르주아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특정한 인간 그룹, 즉 부자들이 번성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영국사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여러 박애‧복지정책이 오히려 재능이 있거나 비범한 사람들, 즉 ‘부자들’의 생물학적 번성을 방해할 뿐이라며 덜 우월한 자들이 계속 도태될 수 있도록 이들의 생물학적, 문화적 죽음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나아가 근대적 경제성장을 이룩한 선진국들의 성공은 과감히 “자선에 작별”을 고하고 우월한 유전자와 가치를 지닌 부자들의 생물학적 번성을 도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자 맬서스(T. R. Malthus)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경제적 도움과 구호가 생존경쟁을 통한 도태를 막고 오히려 한정된 자원 하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삶의 수준을 정체 혹은 하락시킬 뿐이라 주장했다. 맬서스의 이론은 다윈(C. R. Darwin)에게 큰 영감을 준다. 1859년 다윈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역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거쳐 소멸하고 생존, 변화해간다는, 적자생존을 통한 종의 진화 이론을 제시한다. 다윈의 사촌 갈튼(F. Galton)은 다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생물의 유전 패턴을 통해 체력, 힘, 지능, 도덕적 자질이 우수한 개체를 선택적으로 교배해서 한 나라의 국민을 우월한 품종으로 개량할 수 있다며 우생학(eugenics)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기도 했다.

 

부자의 번성과 새로운 우생학

 

이블린 폭스 켈러(Evelyn Fox Keller)의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The Mirage of a Space between Nature and Nurture, 2010, 한국어판 정세권 옮김, 이음 2013)는 과학적 문제와 역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왜, 어떻게 우생학적 사고가 우리의 과학적 담론과 사회정책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책이다. 이제 어떤 학자도 유전자의 특성에 대한 이해에 바탕해서 인종을 개량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후생 유전학(epi-genetics), 발생생물학과 같은 현대생물학의 여러 발전으로 인해 유전자가 한 개체나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정한 요소라는 결정론적 사고가 지닌 문제점들이 밝혀졌다. 현대 생물학자들은 멘델(G. J. Mendel)이 상정한, 하나의 형질을 결정해주는 하나의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유전자 개념이 더이상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사상 유례없는 부의 집중이 이루어진 현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다시 ‘부자들의 번성’에 대한 정치경제적, 생물학적 설명들이 널리 확산됨을 목도하고 있다. 일례로 1994년 헤른슈타인(R. J. Herrnstein)과 머레이(C. Murray)는 인종 간의 지적 능력(IQ)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백인과 흑인의 유전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라 주장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2000년대 들어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그의 저서 『빈 서판』(The Blank Slate, 2002)에서 행동유전학의 첫번째 법칙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적 형질은 유전 가능하다”(373면)라고 주장하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인간이 지닌 모든 행동적 형질 또한 생물학적 본성에 기인한 것이며, 이것은 유전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 여러 다양한 수준에서의 창의적 능력 등의 행동적 형질이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즉 양육에 기인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함의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들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IQ가 40~80% 유전된다면 모든 이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부질없는 ‘비과학적’ 정책이지 않겠는가?

 

차이의 학문으로서의 유전학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는 1990년대 이후 널리 퍼지고 있는 새로운 ‘우생학’에 대해 논리적이고 차가운 비판을 시도한다. 켈러는 생물학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지속되는 이유를 다른 차원에서 찾는다. 그녀는 무엇보다 유전학적 지식에 기반한 인간의 사회적·경제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 유전학이 근본적으로 차이(difference)의 학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유전학의 언어가 종종 유전학적 설명이 지니는 한계를 감추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신기루처럼 그 실체가 모호한 설명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유전학을 통해 사회적‧정치적 정당화를 추구하는 저술가는 물론, 개념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철학자와 실험의 정밀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조차도 유전학적 설명이 지닌 한계를 잠시 잊고 생물체가 지닌 형질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을 종종 제시하는 실수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유전학이 상이한 생물학적 특징을 가진 생명체를 비교하고 이들의 여러 차이를 유전적 차이와 연관시켜 보는 학문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유전자는 형질의 원인이라기보다는 형질 차이의 원인을 가져오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전자는 종종 차이 제조자(difference maker)라 지칭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푸른 눈을 가진 그룹이 A라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고, 검은 눈의 그룹이 A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힐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식의 집단유전학적 설명이 A라는 유전자가 눈의 색깔을 푸르게 만드는 인과적 역할을 했음을 밝힐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동성애나 비만, 자폐 유전자를 찾았다고 선언하고 이러한 유전학적 지식에 기반을 두어 인간의 행동과 IQ와 같은 형질을 설명, 향상시키거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유전학의 논리적, 과학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인과적 설명을 추구하는 학자들의 ‘미끄러짐’이 발생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토록 많은 유명 과학자가 그렇게 쉽게 틀릴 수 있었을까? 켈러는 이러한 미끄러짐이, 어떤 현상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인과적 요소들의 상대적 중요성을 파악하고 이에 기반해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형질을 향상시키려는 희망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이 지나친 사회적‧문화적 편견을 수반할 때 우생학적 사고의 오류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형질의 유연성에 관한 질문들을 찾아서

 

이러한 유전학적 설명의 오류와 미끄러짐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켈러는 생물학적 본성과 문화적, 사회적 양육의 상대적 영향에 대해 논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부분의 인간형질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더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즉 가난과 같은 경제적인 형질, 심지어 지능도 유전된다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전 메커니즘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형질이 유전적일 수도 후생유전학적인 것일 수도, 혹은 문화적·경제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전달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가령 인종과 IQ에 관한 연구에서도 형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입방식이 나타날 수 있다. 지적 행위능력의 인종적 차이에 대한 최근 연구는 한 개인이 지닌 지적 수준이, 그가 인종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배경에서 자랐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크게 의존함을 보여주었다. 켈러는 인간이 지닌 여러 형질이 변화 가능한 것이며, 이들의 유연성과 유전 메커니즘을 다양한 층위에서 밝힐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과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가난이, 지적 능력이, 성적 차이와 위계라는 형질들이 유연하고 변화 가능한 것인지,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메커니즘을 거쳐 유전되고 지속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형질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달시키려는 시민과 학자들의 오랜 열망에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두갑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자연대 과학사 협동과정 교수

2014.7.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