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아베(Ave) 근혜
1999년 가을 뉴욕의 브루클린박물관은 특별전시를 개최했다. 그런데 전시에 소개된 한 작품이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작품 제목은 ‘성 동정녀 마리아’(The Holy Virgin Mary)였다. YBA(Young British Artists)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인 크리스 오필리(Chris Ofili)의 회화작품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흑인으로 묘사하고 그림 위에 실제 코끼리의 똥 덩어리들을 붙인 것이었다.
당시 뉴욕의 줄리아니(R. Giuliani) 시장은 이 작품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고 작품을 철거하지 않을 경우 시 정부가 브루클린박물관에 지원하는 70억원 상당의 연간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박물관 측에 엄포를 놓았다. 이에 박물관장과 이사진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며 반발하였다(예산을 삭감당할 순 없으니 시장 말에 따르자는 내부 의견도 없지 않았다). 이 사건은 법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법원은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박물관의 편을 들었다. 뉴욕시는 작품을 그대로 설치하게 하고 예산안을 삭감하지 말라는 법원의 권고를 수용해야 했다.
뉴욕과 광주, 닮은 듯 다른 예술의 자리
이 이야기는 ‘꼴통 보수’에 대해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거둔 승리담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당시 ‘쎈세이션’(Sensation)이라는 제목이 붙었던 특별전은 세계 각지를 순회하는 제법 큰 규모의 전시였다. 전시 자체가 쎈세이션을 의도한 것이었으니 줄리아니 시장의 성난 반응은 오히려 그 노림수가 맞아떨어지는 데 기여한 셈이었다. 덕분에 줄리아니를 옹호하고 전시를 반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라는 궁금증을 가진 수많은 관객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후 브루클린박물관과 크리스 오필리의 주가는 올라갔다. 반면 줄리아니 시장도 잃은 것이 없었다. 민주당 지지자가 다수인 뉴욕에서 줄리아니 시장의 무식하고도 호기로운 싸움은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살아 있네, 보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최근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 작품이 박근혜 대통령을 신랄하게 풍자했다는 이유로 전시가 무산된 사태를 보면서 나는 뉴욕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언론에 따르면 광주시는 정부에 신청한 일반 예산에 <세월오월>이 악영향을 미칠까봐 전시를 불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사건의 유사한 점은 이런 것이다. 이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정치적 탄압이 아니라 예산 삭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비록 시차가 있으나 이 두 사건은 미술계가 거대 예산으로 운영되는 규모의 경제에 종속돼버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몇가지 중요한 차이도 있다. 첫째, 중앙정부의 예산삭감 위협이 실제로 광주비엔날레 측에 가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오히려 중앙정부가 작품을 문제 삼아 예산삭감을 감행했을 때, 중앙정부에 맞서서 싸워야 할 당사자들(광주시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되려 ‘두려움에 떨며 알아서 기는’ 식으로 작품의 전시를 막았다는 사실. 둘째, 어떤 조직과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의 ‘성모 마리아’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사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풍자는 성모 마리아 그림에 똥칠을 하는 신성모독과 같은 행위로 여겨진다는 사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교도’들도 그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사실.
이 유사점과 차이점이 합쳐져서 이번 광주비엔날레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이 사건은 “‘아베(Ave) 근혜’를 외치는 교단에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예속된 이교도들이 거대 예산의 예술 행사를 실행하고자 할 때, 예술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인 풍자조차 허용할 수 없는 자기기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 초청된 국내외의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자기기만에 동참할 수 없다며 참여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이미 “광주비엔날레 파행”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남은 것은 오직 찬송뿐
흥미롭게도 올해 20주년을 맞은 2014년 광주비엔날레의 슬로건은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이다. 영어 제목에 들어간 단어, ‘the house’에 포함된 여러 정의 중 하나는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장소”라고 한다. 이 얼마나 신성모독적인가! 그러나 이제 이런 해석도 가능하겠다. 이번 사건에서 광주가 불태운 것은 정작 자기네 집이 아닌가! 자기기만을 넘어서 자기파괴로까지 나아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1999년 뉴욕에선 시장논리에 종속된 예술집단과 정치논리에 종속된 관료집단이 모두 승리했다. 반면 2014년 광주에서 예술가들은 전시 기회를 상실했고 광주시와 광주비엔날레 재단은 정당성을 상실했다.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했다.
사태는 달리 진행될 수 있었다. 홍성담 작가의 작품은 전시될 수 있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민중미술의 당대적 가치를 토론할 수 있었고, 신성모독과 풍자의 유효성을 토론할 수 있었고, 우리가 불태우려 하는 집이 과연 누구네 집인가 토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와 재단은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싸움에 같은 편으로 연대할 지원군들(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뉴욕의 윈윈게임과는 다른 종류의 광주 투쟁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귀 기울여보라. 지금 빛고을 한 구석에서 ‘아베(Ave) 근혜’의 찬송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잘 들여다보라.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참으로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져 있다.
심보선 / 시인, 사회학자
2014.9.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