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한국과학기술학회 『과학기술학의 세계』
과학기술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시민에게
- 한국과학기술학회 『과학기술학의 세계: 과학기술과 사회를 이해하기』
“나는 과학기술을 전공하거나 현재 연구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의 본질이나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현재 진행중인 과학기술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선뜻 동의할 수 있는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면 추상적으로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자신을 주어로 삼고 생각해보면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가? 둘째나 셋째 답으로 마음이 기운다면,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 전문가가 아닌데 과학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라는 입장에 가깝다면, 다음 문장들은 어떤가? “나는 체육을 전공하거나 현재 스포츠 관련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현재 진행중인 스포츠 경기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나는 정치학을 전공하거나 현재 정치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현재 진행중인 정치적 사안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만일 첫째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둘째와 셋째에는 동의할 수 있다면, 왜 그럴까?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영역에 각각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거쳐 인증받은 수많은 전문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일상 대화에서 이들의 활동에 대해 논평하거나 훈수를 두는 데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술집이나 지하철에서, 운동 경기나 정치적 쟁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과학기술에 대해 떠드는 것을 듣기 어려운가? 왜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특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과학기술은 전문가의 손에 맡기라고?
“과학기술은 어려워서”일까? 그러나 모든 전문 분야는 어렵고, 따라서 많은 시간을 들여 배우고 익혀야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자의 손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아서”일까? 그렇다면 “정치를 정치 전문가의 손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아서”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제로 제도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은 과학기술 연구 못지않게 복잡하고, 그것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대단한 지식과 경륜이 필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 시민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아니라면, “일반 시민이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려 하면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이 왜곡될 우려가 있어서”일까? 하지만 야구에 대해 논평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야구선수로 뛰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과학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학기술 연구에 직접 개입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과학기술‘을’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전문가로서 뛰어들지 않더라도 한명의 시민으로서 전문 분야의 사안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합리적인 평가를 내리며, 때로는 더 낫다고 믿는 방향으로 제안을 하는 등의 일은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려된다. 그럼에도 유독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을 제외한 시민들이 침묵하거나 수동적으로 추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문장으로 뭉뚱그린다면 “훈련하지 않아서” 또는 “경험을 쌓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성인 대부분이 스포츠나 정치에 대해 한 마디씩 할 수 있는 것은 체육을 제대로 배우고 정치학을 제대로 배워서가 아니라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정보를 모았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과학기술에 대해 쉽게 말하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비전문가로서 과학기술‘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이과 구별이 뚜렷한 한국의 교육체계에서는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이과 출신)과 모르기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문과 출신) 사이의 벽이 높고 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과학기술과 대중의 간극에 다리를 놓자
이 벽을 넘어 다리를 놓고,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른바 ‘과학기술학’의 임무다. 역할이 중복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대중의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과학기술학은 이른바 ‘과학기술운동’과 같은 것도 아니며, 과학기술자들이 종종 경계하듯 “과학기술의 발전에 제동을 걸겠다는” 목표 아래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과학기술학의 목표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과학기술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과학기술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주장하듯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현대사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반대로 현대사회의 특징들을 감안하지 않고는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운영되는 방식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두가지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 시민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이 책은 국내 과학기술학계가 힘을 모아 엮어 낸 과학기술학 개설서이다. 과학기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여 ‘과학자사회’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 ‘행위자-연결망 이론’ 등 과학기술학자들이 기본적인 이론적 도구로 사용하는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또는 대중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과학기술학의 쟁점은 무엇인지도 개괄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위험사회’ 같은 이론에서 과학기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에 따라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의 ‘참여’라는 개념이 어떻게 도출되었으며 이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어떠한 시도들이 있었는지, 과학기술자들이 직접 사회운동에 참여한 예는 어떤 것인지 등, 실제적으로 과학기술과 다른 사회분야가 협상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지점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는 윤리와 정책에 관련된 쟁점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생명공학을 매개로 하여 윤리, 공공정책, 혁신정책이라는 멀리 떨어져 보이는 세 분야가 어떻게 중첩되고 영역을 조정하는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학문 분야는 현재 학계가 합의한 표준적 내용을 담은 교재를 통해 재생산된다. 배우는 이들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이들도 교재를 만들고 그 교재를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런 면에서 “자국어로 쓴 첫번째 교재”란 해당 학문 분야에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한 나라에서 해당 학문 분야의 공동체가 표준적인 견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밑천으로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와 역량을 갖추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이러한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 기여한 이들이 앞으로도 과학기술에 대해 더 많은 논평과 제안을 내놓을 것이고, 그것을 읽는 독자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4.10.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