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선거제도 개편, 지금이 기회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단언컨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는 선거제도의 역사다. 독재에 저항한 수십년 민주화운동의 피와 땀과 눈물은 ‘선거’에 진하게 배어 있다. 권력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긴 하지만 선거는 한국 민주화운동이 이룩한 가장 강력하고 자랑스러운 증거다. 한국사회에서 선거는 가장 반칙이 적으며, 승패를 쉽게 예측할 수 없고, 승패를 주고받는 ‘공정한 전쟁’ 혹은 ‘공정한 게임’이 되었다.
실제로 선거는 전쟁과 스포츠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가까이 가면 적과 동지로 편을 갈라 상대를 증오하고, 스포츠로 가까이 가면 여와 야로 부르며 평화적으로 경쟁한다. 아담 셰보르스키(Adam Przeworsk)의 말대로 민주주의란 ‘집권당이 (평화적으로) 야당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체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처분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체제를 1987년에 합의했다. ‘신생 민주주의는 두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공고화된다’는 쌔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말을 상기한다면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 민주주의는 위대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 어디로 가야 하나
민주주의의 여정엔 첫걸음은 있지만 마지막은 없다.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다음 목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방법 역시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제왕적 대통령이 문제니 개헌을 통해 분권형 대통령제로 그 권한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는 리더십의 약화가 문제의 본질이니 더 강력한 대통령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반대의 주장을 한다.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임기가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권력구조가 핵심이 아니라 지방분권을 넣거나 기본권 조항을 손봐야 한다고도 한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급한 과제가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한국사회의 ‘갈등관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정치의 핵심적 문제는 한국사회의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을 관리하는 데 실패하는 정치구조에 있다.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선거와 소선거구제의 승자독식주의가 정치를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 ‘보수타도’ ‘진보박멸’ 식의 전쟁 같은 구호가 정치를 지배하는 동안 자기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를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는 깊은 절망으로 빠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갈등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면 갈등의 내용에 걸맞은 갈등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마침 헌법재판소가 선거구 간 인구편차를 3대 1에서 2대 1로 줄이라고 한 것이 새로운 구조를 만들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이미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는 양당제로 담을 수 없다. 다당제로 가야 한다. 역사적 경험으로도 그것이 낫다. 노태우·김영삼정부 시기에 한국정치가 역동적이었던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과는 달리 (선출권력이었던) 정치가 (비선출권력인) 관료·재벌보다 힘이 셌다는 것과 더불어 다당제(특이하게도 소선거구제였음에도 극에 달한 지역주의로 인해 다당제가 성립했다. ‘3김’의 퇴조와 함께 2000년부터 양당제가 되었다)였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은 반대다. 비선출권력인 관료, 대기업, 법조가 선출권력인 정치보다 힘이 더 세고, 무엇보다 정치구조가 기득권화된 양당제로 고착됐다. 한국에서 선거로 뽑는 정치인은 기초의원까지 포함해서 5천명도 안된다. 미국은 50만명이 넘는다. 반면 시험을 통해 뽑는 관료는 100만명이나 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고위관료 8000명이 선거가 끝나면 자동 교체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또하나의 과제인 관료에 대한 ‘문민통제’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보여주는 숫자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의 의의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를 다당제로 반영하자는 데는 어느정도 동의기반이 있는 것 같다. 다만 그 방법으로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중대선거구제를 선택할 것인지의 차이가 있다. 어느 제도를 선택하든 지금의 기득권 정당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환영할 만하지만 나는 중대선거구제가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를 좀더 역동적으로 반영할 것으로 전망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는 기득권 양당제를 유지시킬 가능성이 크므로 3~5명을 뽑는 것이 좋다. 예컨대 수원·성남·고양·부천 같은 도시는 지금과 같이 4명을 뽑고 서울의 경우에는 2개구에서 4명을 뽑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한 선거구에서 2명 정도의 후보를 복수공천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은 소선거구제를 유지할 수 있다. 농촌의 대표성이 줄어든다는 비판이 있지만 현재 산업구조를 볼 때 오히려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서비스와 제조업의 갈등구조를 더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오히려 인구편차를 1대 1로 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지역대표성의 문제는 통일과정에서 양원제를 통해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가 비례대표제보다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하는 이유가 몇가지 있다.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권역별 비례대표를 확대할 경우 공천과정에서의 중앙당 개입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또 지금까지 전문가나 소수자 배려에 의한 비례대표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는데,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전문가들도 충분히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대선거구제는 현재 기득권 정당구조에 더 큰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지역에 대한 책임을 해당 의원 혼자 지게 되지만 중대선거구제에서는 여러 당의 의원들이 함께 지게 됨으로서 갈등이 완화된다.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비판자들은 표의 불비례성을 들지만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당선자들은 낙선자들의 표를 이전받아 득표수가 올라가게 될 것이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라면 보좌관 수를 지금의 두배로 늘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도 지금보다는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를 조금 더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선거제도 개편으로 들어가서 개헌으로 나오는 것이 맞는 방향인 것 같다.
박성민 / MIN컨설팅 대표
2014.11.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