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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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우부카타 토우 장편 『천지명찰』

하늘에 숨어 있는 과거와 현재의 정치
-우부카타 토우 장편 『천지명찰』, 북스피어 2014

 

 

herer하늘은 쉽게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약간의 관심을 갖고 꾸준히 하늘을 관찰하면 해와 달과 별의 운동이 상당히 규칙적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은 더 열심히 관찰하고 더 열심히 계산할수록 더 큰 혼돈을 드러낸다. 해와 별(항성)이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평균 약 365.25일이 걸리며, 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는 평균 약 29.53일이 걸린다. 행성들은 밤하늘에 붙박여 있지도 않고 여기저기 어지러이 돌아다닌다. 더욱이, 선조들로부터 전해내려온 관측기록 속 별자리의 위치는 오늘날과 미세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달라서, 근면한 관측가를 좌절케 하기도 한다.

 

우주를 이해하려 한 인간의 노력

 

조화로워야 할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끝자리가 어찌 이리 지저분한가? 이 모든 혼란은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여러가지 운동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고 가정하게 마련인 인간의 감각에 맞게 환산하여 이해하려다보니 벌어진다. 지구는 자전할 뿐 아니라 태양 주위를 타원궤도를 따라 공전하며, 그 각각의 주기는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진다. 또한 지구의 자전축은 기울어진 팽이의 회전축처럼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간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아니 믿고 있다. 우주가 이렇게 생겼다고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삼백년만 거슬러올라가도 지구상의 사람들 대부분은 우주를 매우 다른 모습으로 이해했고,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놓고 다른 천체들의 움직임을 계산하였다. 그 결과 훨씬 복잡한 모형이 필요했고 훨씬 복잡한 계산으로 복잡한 숫자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우주의 움직임이 복잡하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의 길이나 한해의 길이를 매번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어느정도의 오차는 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 오차가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누적된다는 점이다. 가령 부활절에 눈이 온다든지, 동지가 지났는데도 해가 더 짧아진다든지, 기타 사회관습상 중요한 날짜들이 계절과 맞지 않는 사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권력이 아무런 실용적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을 먹여주고 후원해주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력(改曆). 오차가 너무 크게 누적되기 전에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력을 바꾸기 위해 그 많은 천문학자들은 매일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털끝만한 변화를 추적했던 것이다.

 

천문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서사

 

『천지명찰』의 주인공 시부까와 하루미(渋川春海, 1639~1715)도 개력사업에 반생을 걸었다. 시부까와는 원래 에도 막부에서 바둑을 담당한 야스이(安井) 가문의 계승자였으나 바둑보다는 산술과 천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당에서 도입한 선명력(宣明曆)을 800여년째 개력 없이 써오고 있었는데, 선명력의 오차가 누적된 결과 동지를 비롯한 모든 절기가 이틀씩 늦어지고 말았다. 시부까와는 원대의 역법인 수시력(授時曆)의 원리를 탐구한 후, 그를 바탕으로 일본의 위도와 17세기 후반 지구 자전축 방향을 반영한 야마토레끼(大和暦)를 정초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조오꾜오(貞享) 원년인 1684년 조오꾜오레끼(貞享暦, 이하 정향력)라는 이름으로 반포됨으로써 일본도 최초로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하게 되었고, 시부까와는 초대 천문방(天文方)으로 임명되어 막부의 천문 역산을 총괄하였다.

 

사실 정향력으로의 개력은 좀 새삼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정향력이 반포된 1684년이면, 중국과 조선에서는 명대의 대통력(大統暦)을 지나 예수회 선교사가 서양 천문학을 가미하여 만든 시헌력(時憲曆)이 사용되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세종대에 수시력을 바탕으로 이슬람 천문학의 요소까지 가미한 칠정산(七政算)을 완성하여 독자적인 역의 계산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시부까와가 천문학을 배웠다고 전하는 쿄오또의 천문학자 오까노이 켄테이(岡野井玄貞)는 일찍이 1643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인 나산 박안기(螺山 朴安期)를 만나 수시력의 이치를 배웠다. 이런 맥락을 감안하면, 일본에서 17세기말에야 수시력법에 기반한 최초의 독자적 역법이 나왔다는 것은 만시지탄을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시부까와와 정향력의 이야기는 영웅서사이며 이 소설은 일종의 영웅 성장소설이다. 가문에 주어진 사명보다 자신의 꿈을 쫓는 시부까와의 개인사도 흥미롭지만 그가 추구한 꿈이 다름 아닌 오늘날의 일본인이 높이 사는 ‘에도 시대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의 과학은 동아시아 전통과학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의 한계를 시험하고 새로운 모색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근대 초기에 서양 과학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을 마련했다는 지배적 해석을 등에 업고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 책에서 박안기와 오까노이를 언급하지 않는 대신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와산(和算)의 창시자로 불리는 세끼 타까까즈(関孝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신사에 봉납한 기하학 문제풀이 그림판을 통해 교류하는 시부까와와 세끼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수학과 과학을 토론하는 것이 에도 시대의 자연스러운 문화의 일부분으로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조선통신사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도 시부까와가 천주교 탄압을 무릅쓰고 서양의 과학문헌을 구하여 읽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작가는 동아시아 전통에 종속되지 않고 서양과의 교통을 통해 그 전통을 넘어서려는 일본의 모습(매우 친숙하지 않은가?)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이 일본 평단과 시장에서 동시에 호평을 받았던 것은 이와같이 일본 독자들의 기대감을 잘 채워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과학기술 전통의 현재성

 

다만 과거의 영웅에 가탁하여 과학과 근대성에 대한 현재의 기대를 채우려는 시도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천지명찰』의 완성도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시부까와와 주변인물들을 무리하게 근대적 인물로 그려내는 대신 당시의 시대상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데서 손을 멈추고 근대성과의 연결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장영실을 다룬 한국의 일부 작품이 빈약한 자료를 극복하지 못한 채 장영실을 근대인이자 과학영웅으로 호명하겠다는 일방적인 의지만 두드러지게 내보이는 것과 비교하면, 이러한 꼼꼼하지만 절제된 묘사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늘은 인간사에 무심하게 그저 저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천문학이야말로 제왕의 학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심대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국가의 역량을 과시하는 오늘의 정치뿐 아니라,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에 원용하는 어제의 정치에서도 천문학은 매우 유용한 소재가 된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가 커질수록, 과거는 더 새롭게 다시 쓰이고 과학기술의 전통도 계속해서 새롭게 주조된다. 과학기술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라는 장르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역사가가 그 텍스트의 윤회전생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이유다.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5.1.21 ⓒ 창비주간논평